헝가리 부다페스트 (2016~2017 세계 여행)
부다페스트는 역시 부다페스트
해질녘마저 아릅답지 않은 도시도 참 드물다. 미관으로는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서울조차도 해질녘 만큼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서울'이라는 이름, 참 좋지 않은가. '울'이란 글자가 풍기는 고유의 느낌이 있다. '울'이 들어가는 단어들 중 긍정적인 것들을 몇 안 된다. 우울, 울적, 울컥, 등등. 그래서 그런지, '서울'은 어쩐지 모르게 애틋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풍긴다. '안녕'과 더불어, 내가 발음하기 가장 좋아하는 한국어 단어들 중 하나다. 어쨌든. 여행을 다니며 야경이 예쁘다는 많은 도시들을 만나보았지만, 사실 야경이 예쁘지 않는 것도 참 힘든 일이다. 그 곳 주민들도 자신들이 거주하는 도시에 뭐 하나 정 붙일 시간은 짧게나마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꿔 이야기하면, 야경마저 괜찮지 않은 도시는 정말 미관상으로는 내세울 게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여행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나는 '야경'에 대한 신비감이나 호기심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호스텔 직원들이 도시 야경을 하도 칭찬하여 기껏 나가보면, 그냥 '볼 만 했던' 경우들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멋지다는 이야기는 한국에서부터 꾸준히 들어왔다. 이 곳 호스텔의 직원 역시, 유람선에서 야경을 보는 게 그렇게 좋다고 추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설명을 듣자 어쩐지 모를 의구심과 경계심만 피어났다. 유람선 예약을 대신해서 해줄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나는 생각부터 좀 해보겠다고 답했다.
어제 오후 부다페스트에 도착하고, 잠시 방에서 쉬다가 저녁 시간대에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답사해 볼 예정이었다.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부다페스트까지는 두 시간 반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고, 거기에 잠깐 쉬기까지 했으니 몸이 피곤하지 않을 거라 쉽게 착각했다. 최근에 느끼는 모든 피로함의 원인은 캐리어인 듯하다. 야경을 답사할 예정이었던 도나우 강과 숙소는 걸어서 20분 거리였는데, 근처에서 저녁을 간단하게 먹으니 야경은 무슨 놈의 야경, 어서 빨리 숙소의 침대로 돌아가고픈 극심한 피로가 찾아왔다. 답사 계획 같은 건 보기 좋게 내팽겨치고, 오는 길에 맥주를 몇 캔 사서 침대에서 행복한 음주를 즐겼다. 80일이 다 되어가는 여행 중에서 가장 최악에 속하는 와이파이 환경이 너무 답답하여 분노하기도 했으나, 피곤했던 나머지 맥주를 다 마시고 난 뒤에 바로 잠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이틀 동안 연속으로 오전 일곱 시 반에 일어나는 강행군을 소화해냈다. 전 날엔 빈을 가야했고, 다음 날에는 또 이 곳 부다페스트로 이동해야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어떻게 매일 아침 저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날 수 있었는지 모르곘다. 이런 걸 보면 대학이라는 게 참 징그럽게도 무서운 놈이기는 하다. 숙소의 방음 시설이 그리 잘 돼 있지는 않아 아주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충분한 숙면은 취할 수 있었다. 와이파이도 잘 안 돼, 방음도 개판이야, 이 숙소는 참 오랜만에 만난 양심없는 호스텔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찌뿌둥한 몸을 상쾌한 요가와 필라테스 자세로 이겨냈다, 라면 참 웰빙적인 삶이겠으나, 아, 또 하루구나, 싶은 심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행의 매 순간이 행복한 건 절대 아니고, 그래도 좋은 건 불행할 날들은 평소보다 적다는 건데, 그렇다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마저 즐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가와 필라테스는 무슨. 곤봉을 던지고 난 후의 손연재처럼 침대 매트 위 여기저기를 굴러다녔다. 정말 진지하게, 그냥 오늘은 계속 잘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부다페스트까지 와서 잠만 자는 건 너무 아쉽지 않겠냐는 스스로에게 계속 합리화를 했다. 아니야, 이 친구야 잘 생각해봐, 모든 관광을 포기하고 이렇게 잠만 자는 것도 추억이 될 거야. 다행히 천사가 악마를 이겼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니 그래도 조금 피로가 가시는 듯했다. 관광이고 뭐고를 앞서, 우선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가급적 피하고 싶은 문제들이기도 했다. 바로, 앞으로의 일정을 확정하는 일이었다. 세상에. 이건 마치, 대학교 1학년 시절 한창 돈을 써야 하는 약속이 많았던 날들에, 과외비 입금을 열흘이나 앞두고 떨리는 마음으로 통장 잔액을 확인할 때 만큼이나 두렵고도 불쾌한 일이었다. 구글 지도를 켜놓고, 멍, 하게 바라보았다. 늦어도 다음 주면 순례길을 시작해야 하기에, 남아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을 준비하며 다른 이들에게 굳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이 순례길이다. 소문 같은 것 내지 않고 혼자 조용히 다녀올 걸. 굳이 뭣하러 얘기해서 빼도박도 못하게 되었을까.
번뇌에 가까운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가고 싶은 도시들을 전부 가려면 갈 수도 있을텐데, 그럴 경우 몸이 남아나지를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미련 없이 포기할 만한 성격도 못 되고. 그 둘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크로아티아 여행은 아예 버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여행을 하며 조금은 덜 절박할 수 있다는 것이 젊음의 특권일 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또 기회가 있겠지, 라고 훗날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랜동안 내 마음을 잠식해 온 고민거리가 이런 식으로라도 해결되니 다소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 어떤 작가의 SNS에서, 그녀가 최근에 여행할 때는 과거의 낭만과 즉흥을 잃어가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 글을 읽은 적 있었다. 본인도 모르게 자꾸만 호텔 예약 사이트와 지도 어플리케이션에 손이 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와 어느 정도 세대 차이가 있는 나같은 경우는, 스스로 행했던 태초의 여행 형태가 바로 스마트폰에 의존한 여행이다. 나름대로 즉흥적으로 다니고 있다고 자부아닌 자부를 하는 이 여행조차도, 최소한 전 날까지는 숙소를 예약해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예약 어플리케이션을 거치지 않고 현지에서 직접 숙소를 잡게 되면, 게으름의 댓가로 꽤 많은 돈을 더 지불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이건 낭만도, 즉흥도 아니다. 여행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최소한 하루 전쯤의 예약은 내게 있어서 필수다. 그걸 정말 '하루 전'까지 미루고 미루다, 오늘 오전에서야 일정을 확정했다. 아팠던 머리가 이제서야 맑아졌다.
브라티슬라바만큼이나, 부다페스트 역시 따뜻한 곳이었다. 그 곳보다 일조량은 더 많았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선글라스를 꼈다. 선글라스는, 나를 저팔계로 만든다. 살은 점점 빠지고 있지만, 선글라스를 끼면 어쩐지 어깨에 바주카포를 올린 느낌이다. 세상 그렇게 당당해 보일 수가 없다. 부다페스트 거리를 런웨이 삼아 걸음을 걸었다. 우선은 그냥 걸었다. 어디를 가야할 지 마땅히 아는 게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도시에 도착하게 되면 구글에 'Must See'를 검색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귀찮게 되었다. '머스트'라 해봤자 성당 정도 있겠지, 싶은 마음에 그냥 이리저리 걸어다닐 뿐이다. 계속 걸어가니 도나우 강이 보였다. 슬라바키아와 오스트리아에서도 도나우 강이 흘렀는데, 부다페스트에도 같은 강이 흐른다. 정말 더럽게도 긴 강이다. 그 중에 부다페스트의 도나우 강이 제일 예쁜 듯했다. 숙소에서 출발하여 다리를 건너 관광지쪽으로 건너가서 성곽을 올랐는데, 전망이 아주 좋았다. 오르면 오를 수록 강과 어우러진 전망이 더욱 두드러졌다. 솔직히 의외였다.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사실 당위에 가까운 마음으로 오늘 관광을 시작한 것이었는데, 뜻밖에 펼쳐지는 기가 막힌 경광에 괜히 내가 미안하게 느껴졌다. 여행의 기쁨은, 그 방정식의 차수가 굉장히 낮은 데에서 기인한다. 오, 어쩐지 유식한 소리 같은데, 아무튼. 여행의 방정식은 1차 방정식이다. 그래프로 그리면 정비례 우상향 함수에 가깝다. 조금 더 돈을 내거나, 조금 더 움직이면 더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귀찮음을 이겨내고 숙소를 나왔더니, 상당히 멋진 부다페스트를 경험할 수 있었다.
프라하 이 후, 브라티슬라바와 빈을 거치며, 외지인의 입장에서 이러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시시하다'라는 느낌이 자꾸 들었는데, 부다페스트는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한 도시였다. 프라하나 부다페스트나, 유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듯했다. 성곽 주변을 계속 거닐고 그 근처에서 사진을 찍으며 놀다가 내려왔다. 이제 조금씩 해가 지려는 게 보였다. 숙소로 돌아가면 오늘 다시는 나오지 못 할 것 같아, 야경까지는 보고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어디서 마땅히 봐야할 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정말 유람선을 타야 하는 건가. 하지만 이건 뭔가 부다페스트에 오는 모든 관광객들이 다 하는 것 같아서 그리 내키지 않았다. 조금은 역동적이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고. 나에게는, 남들의 여행과 크게 다르지도 않으면서도 달라 보이고 싶어하는, 이상하고도 왜곡된 형태의 인디병이 있다. 유람선은 조금, 역동성의 이미지가 덜 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한참 고민하며 그냥 이리저리 걷다가, '자유의 다리'라는 다리 뒷편의 언덕을 발견했다. 문득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뒷산에 올라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래, 저기서 야경을 보자. 베르겐의 뒷산은 등산에 가까웠을 정도로 오르기 힘든 곳이었지만, 그래도 여기는 그 정도는 아닌 듯했다. 이 곳에는 피나쿨라도 없었다. 그건, 충분히 걸어갈 만하다는 소리였다. 자신감을 안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음, 이쯤 되면 정상이 나와야 하는데, 이상하게 여기도 높네. 뜻밖의 높이에 당황하며 한참을 걸었다. 정상에 오르니 땀이 꽤나 나있었던 상태였다. 오늘은 참 '의외'가 많았다.
콜라를 한 병 사서 마셨다. 언덕 정상에는 나처럼 정신 나간, 아니, 모험심 가득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난간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해가 슬슬 지고 있는 중이었다. 예뻤다. 정말로, 존나, 예뻤다. 유람선을 타보지 않아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산 위에서 도시 전체에 하나 둘 불이 켜지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게 참 좋았다. 콜라가 아니라 맥주를 살 걸 그랬다고 조금 후회했다. 땀이 식을 때는 살짝 춥기도 했으나,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쌀쌀하지 않은 날씨였다. 해가 지는 도나우 강변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조금씩 조금씩 모습이 변했고, 20분쯤 지나자 짙은 어둠이 도시 전체를 감쌌다. 그 20분 동안의 변화가 상당히 멋있었다. 해질녘이, 또 야경이 멋있다고 자부하는 도시들을 많이 만나보았지만, 부다페스트는 그 중에서도 정말 멋진 곳이었다. 이리저리 셔터를 눌러 화면에 담았다. 해가 있을 때는 역광이 심하여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는데, 그래도 야경은 미약하게나마 카메라에 건질 수 있었다. 정말 여행의 주적은 역광이다. 도나우 강이 이토록 멋지고도 예쁜 강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충동적으로 올라온 언덕이었는데, 이런 충동은 여행 내내 견지하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 위에 머무르다 내려왔다. 짙은 어둠 만큼이나 짙은 여운이 마음에 내렸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 순간을 쉽게 잊을 수는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부다페스트의 일몰이 그랬다.
그 여운을 간직하고자, 숙소 근처의 대형 마트에서 청포도 하나와 맥주 네 캔을 구매했다. 음, 이건 뭔가 인과관계가 안 맞는 것 같긴 한데. 꽤 맛있게 보이는 스테이크용 고기도 진열되어 있었다. 이 숙소에는 공용 주방이 없어서 저걸 구워 먹을 수 없다는 게 다소 아쉬웠다. 스테이크를 요리하기 위해서는 팬을 뜨겁게 달구어야 한다고 알고 있어서 그 동안은 도전할 엄두도 못 내었는데, 얼마 전에 검색하다보니 그냥 소금과 후추만 뿌리고 구워도 괜찮다고 하여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뭐 어차피 내가 먹을 건데, 조금 덜 익거나 더 타면 어때. 입맛만 다시며, 고기와 인사했다. 안녕, 다음에는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나자꾸나. 장바구니 속 맥주캔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꽤나 흥겨웠다. 아까의 일몰을 지켜보며, 어차피 시간은 많고 할 건 없으니 동영상을 찍었다. 20분 정도의 영상인데, 숙소로 돌아와 이를 타임랩스로 만들어보았다. 혼자 다니다보니, 정말 별 짓을 다 한다. 삼각대가 없어서 그런지 손떨림이 너무 심하게 느껴지기는 하는데, 그래도 시간의 변화가 느껴지는 영상이라 괜히 좀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20분의 영상이 1분 남짓한 타임랩스로 압축되는 걸 보니, 새삼 이 여행 전체가 타입랩스처럼 빠르게 스쳐가는 듯 하여 괜히 조금 울컥하기도 했다. 여행 자체는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순례길 전의 일정만 보면 이제 어느덧 종반부다. 그리 빠른 것 같지는 않으면서도 또 굉장히 빠르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오랜만에 넬의 노래, 'Home'이다. 가사처럼, 언젠가 이 여행의 '기억만으로도' 내 심장이 뛸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