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부다페스트-크로아티아 자그레브 (2016~2017 세계 여행)
길고 긴 여행을 돌아보며
비가 내리는 부다페스트의 아침이었다. 언젠가는 그치겠지, 싶은 마음으로 근처 커피숍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치기는 커녕,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많은 비가 내리는 듯했다. 몇 시간 뒤 캐리어를 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 하는데, 조금 걱정이 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가만히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게 그리 나쁘지 않다. 창 밖에는 간헐적으로 트램이 지나다니는 중이다. 이 곳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교통 수단일텐데, 내게는 굉장히 이국적인 모습이다. 낡은 트램이, 비오는 날의 운치를 더해주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어제 비가 내리지 않은 덕분에 그 황홀한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여행은 참 한끗 차이로 많은 것들이 달라지곤 한다.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는 날 비가 오는 것도 별로지만, 그 보다 더욱 분명한 최악은 야경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에 내리는 비다. 어제도 비가 내렸다면 그 언덕을 오르는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높은 곳에서 천천히 해가 지는 광경을 지켜보지도 못했을 테고. 삶의 어느 경험이나 다 그렇겠지만, 은근히 여행에도 생의 무력감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강박에 가깝다시피 완벽한 준비를 한다고 해도, 당일의 날씨 사정이나 다른 변수에 따라 모든 것들이 의외의 방향으로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것들 앞에서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은 행운이 조금이라도 더 내 편이기를 기대하는 바람 뿐이다. 여행의 장점이자 단점은, 분절적인 하루하루다. 나쁜 하루를 보냈다고 그게 다음 날 이어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날 역시도 마냥 계속되지 않는다. 실망이 오래 지속될 이유도 없지만, 역시 반대로 만족감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을 틈도 없다. 하루를 마칠 때 즈음에는, 역시 아무런 상관없이 시작될 다음 날을 새로이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떠나보낸 하루들이, 이젠 어느덧 80일에 이르렀다.
80일. 이 거대한 날들 전체를 여행에만 소비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쉽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마땅히 돌아가야 할 기한이 없는 건, 자유로움과 동시에 막막함을 느끼게 한다. 첫 날, 영국 런던의 불편한 호스텔 침대에 누워, 이제 이를 어쩌나, 하는 탄식을 잠깐 내뱉기도 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불확실하고, 불안했다. 그렇게 여행이 시작됐고, 낯섦이 줄어든 자리에는 익숙함과 무덤덤함, 그리고 약간의 권태가 피어났다. 하루가 무척이나 짧다고 느껴진 적은 별로 없었다. 특히 기차나 버스로 긴 이동을 해야할 때는, 남아 있는 시간이 그렇게도 지겨울 수 없었다. 그래도 첫 날부터 지금까지의 80일을 재빨리 되감아보면, 기억에 남는 건 좋았던 순간들 뿐이다. 여행에서의 기억 체계는 일상에서와는 조금 다르게 작동하는 듯 하다. 분명 싫증과 권태를 강하게 느꼈던 날들도 있었는데, 그런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쁘지 않은 편협함이다. 여행의 매 순간이 행복했던 건 절대 아니지만, 불행하다고 느꼈던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아주 드문 수준이 아니라, 그런 날은 아예 없었다. 싫증, 혹은 권태와 불행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한다. 살다보니, 행복해지는 것만큼이나 불행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게 얼마나 가치있고 어려운 지 절절히 느끼고 있다. 무탈한 안녕이야말로 그저 건강한 인생이라는 생각이다. 건강할 때 스스로가 왜 건강한 지에 대해, 혹은 건강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듯, 삶의 행복이든 무탈함이든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는 인생이 오히려 행복과 무탈함에 더욱 가까운 삶일 지도 모른다. 운이 좋게, 여행에서는 그런 날들을 누리고 있다. 그저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하루가 저물면 다시 완전히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 하고, 그러니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모두가 독립적인 날들을 살아가다보니, 부정적인 것들에 그리 천착하지 않아도 되는 게 여행의 또 다른 장점이다. 금액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꾸준한 연속성으로 하루하루를 관통하는 요소는 여행에서는 드물다. 물론 그 만큼 안정감과 익숙함, 혹은 편안함을 느낄 겨를이 많지 않기도 하다. 이건 또 여행이 아니라 일상 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다. 굉장히 갑갑하고도 답답한 벽으로 둘러쌓인 게 일상 같지만, 가끔은 그 벽에 기대어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여행은, 일상에 비하면 허허벌판 같다. 자유롭지만, 어딘가에 의지하거나 기대기는 어렵다. 그런 익숙함이 문득 생각나는 순간들도 있지만, 이를테면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체크아웃을 할 때 라든지 그럴 때, 그럼에도 아직은 일상의 선물이 그렇게 그립지는 않다. 짧은 여행을 할 때라면 굉장히 목적지향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한정된 시간에, 봐야할 것들을 다 보고, 그리고 가야할 곳들에 다 가야 한다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 오래되고, 새로운 것들에 점점 놀람과 낯섦의 감흥과 궁금증이 사라지는 게 다소 아쉽기는 하나, 그 덕분에 오히려 조금씩은 더 홀가분하게 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한 도시에 머무르는 기간은 이전보다 훨씬 더 짧아졌음에도, 마음은 더 여유롭다. 혹시 놓친 게 있다면, 뭐 그 동안 봐왔던 것과 비슷했겠지, 라고 다소 쿨한 마음을 쉽게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어제처럼 멋진 하루를 보내게 되면, 다시 감탄하며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안정된 심리 상태에 도달한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물론 여전히 많은 것들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여기까지 쓰는 동안에도, 비는 아직도 많이 내리고 있다. 이제 슬슬 자리를 일어나야 될 때가 다 되어가는데, 조금 우려된다. 많은 것들에 익숙해졌다 하면서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들이 꽤 있다. 비 오는 날의 이동이 그 중 하나다. 이건 80일이 아니라 800일을 여행해도 쉽게 익숙해질 수 없을 듯하다. 좋게 생각하면, 80일을 기념하는 비, 일 리는 물론 없겠지. 자그레브에는 저녁 9시가 다 되어 도착할 예정이다. 가급적이면 그렇게 늦은 시각에 도착하는 이동은 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오늘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숙소를 잘 찾아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런지. 오늘의 플레이리스는 장필순의 'Goodbye'다. 그나저나 80일의 세계일주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대륙들을 찍고, 찍고, 또 찍고만 다녀도 아주 힘들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