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피란 (2016~2017 세계 여행)
단연 최고
피란은, 기대가 정말 높았던 도시였다. 이렇게 문장을 작성하면, 보통 그 기대에 미치지 못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의 피란은, 그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아니, 과장없이 이야기해도, 이 곳을 오기 위해서 그 동안을 살아냈었나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피란에서 나흘을 머물기로 한 것이, 어쩌면 이 여행 중에 가장 잘 한 선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멋진 도시였다. 밝은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성격이기에, 숙소에서는 가급적 암막 커튼을 치고 지낸다. 오후가 다 되어 커튼을 제쳤는데, 아,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는 단단한 확신이 들었다. 영화 <디아더스>에서 본인들이 귀신이라 믿지 않던 귀신들이 커튼을 열 때와 비슷한 충격이 밀려왔다. 세상에. 지구 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숙소 밖으로 나가 이 광경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에 얼른 샤워를 했다. 마음은 두근댔다. 맥주를 한 캔 마시며, 흥을 고조시켰다. 맥주 한 캔을 더 챙기고, 숙소를 나섰다. 떨리는 가슴이었다. 부푼 감정을 굳이 주체하지는 않았다. 숙소와 바닷가는 단 30초 정도 떨어져 있다. 골목을 돌자마자 푸른 바다가 보였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건 반칙이지,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존나, 개, 등의 감탄사, 를 빙자한 비속어들을 마구 쏟아냈다. 내 언어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런 놀라운 광경 앞에서 아주 점잖게 멋진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위인은 못 된다. 하지만 그럼 좀 어떠랴. 이 아름다운 세상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하이쿠라도 한 구절 읊을 수 있다면 참 좋았으려만.
경이로움이 가득 들어섰다. 5분도 안 되어, 피란은 내 인생 최고의 도시로 자리 잡았다. 이 멋진 도시에 나의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어쨌든 그 만큼이나 놀라운 도시였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앞으로 이틀을 더 머무를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런 축복으로 다가왔다. 버스가 연착되는 등, 이곳까지 오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마땅한 통과의례로 느껴졌다. 원래 좋은 것들은 비싼 법이다. 이 멋진 도시에 오기 위해 치뤄야 했을 비용이라 생각하니 모든 게 용서되었다. 나같이 삐딱한 사람도 한없이 너그럽게 만드는 도시였다. 놀라움에 가득 찬 마음으로 피란을 걸었다. 어디든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덕분에 매 순간이 즐거웠다.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한 종탑을 지나 뒷편으로 향했다. 숙소 근처의 바다에는 이런저런 요트들과 배들이 이국적임을 잘아하고 있었다면, 뒷 편의 바다는 아주 고요하고도 맑은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물의 색이 정말 아름다웠다. 투명하면서도 아주 예쁜 푸른 빛이었다. 가져온 맥주를 그 때 꺼냈다. 행복했다. 맥주가 가방 안에서 굴러다녔다 보니, 캔을 열었을 때 안의 내용물이 조금 쏟아지기도 했다. 평소였다면 굉장히 언짢은 상황이었을 테지만, 어쩐지 이 순간에는 그 거품이 샴페인처럼 느껴졌다. 인생 최고의 맥주였다. 결국 술은 분위기로 마시는 거라는 진실이 오늘 새삼 증명됐다. 여태껏 아주 많은, 그리고 맛있는 생맥주를 마셔왔지만, 이곳에서의 캔 맥주 만 한 게 없었다. 천국이 있다면 여기와 비슷한 모습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행복한 발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경이로운 광경도 끊이지 않았다. 날도 무척이나 따뜻했다. 고작 후드티 하나만을 입었음에도, 조금은 덥다 싶을 정도의 날이었다. 완연한 봄이 피어나는 중이었다. 봄의 향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꽃이 있었다. 그것의 향은, 피란의 경관과 정말 잘 어우러졌다. 애쓰지 않아도 이곳의 아름다움이 오감으로 충분히 느껴졌다. 24시간 내내 술에 취해보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찾아온 곳이었는데, 술보다 더 멋진 이 세상에 먼저 취해버릴 듯했다. 그 만큼이나 아찔한 아름다움이었다. 오로라를 봤던 아비스코에서의 아찔함이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아찔함이었다면, 오늘의 아찔함은, 당분간은 이 만큼의 감흥을 느끼기는 힘들겠구나 하는 아쉬움에 기인한 아찔함이었다. 처음 계획했던 다른 모든 일정들, 이를테면 크로아티아 등을 다 포기하고 피란을 선택한 것이었다. 자연스레 불안함이나 의구심이 있었다. 피란이라는 곳이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지는 섣불리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작년에 방영됐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조인성과 고현정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곳이 바로 슬로베니아의 피란이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행복하지 않는 게 더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기대치를 이토록이나 웃도는 여행지는 처음이었다. 그 기대치가 적지도 않았기에 더욱 놀라웠다. 프로야구로 따지자면, FA 시장에서 100억을 주고 데려온 타자가, 매 경기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인 트라웃 이상의 성과를 보이는 것과 같았다. 낙원은 실존하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고기와 술을 구매했다. 어쩐지 기분을 내고 싶었다. 스테이크 두 조각과 소시지를 구웠고, 와인을 곁들여 먹었다. 올라오는 취기가 전혀 밉지 않았다. 오히려 한껏 취하는 것이 이 도시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뜬금없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져 다시 마트로 향했다. 숙소에 냉장고도 있겠다, 꽤 큰 아이스크림 한 박스를 샀다. 바닐라, 초코, 딸기 맛의 클래식한 아이스크림이었다. 밥 숟가락 정도 되는 큼지막한 숟가락으로 마구 퍼먹었다. 슬로베니아의 물가도 나름대로 저렴한 편이라, 이렇게 배부르게 먹었는 데도 가격이 그렇게 나가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좋은 건 재료가 남아서 내일과 모레도 여전히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여행에서는 먹는 것에 별다른 미련이 없는 나지만, 그래도 즐거운 식사를 하니 기분이 제고되었다. 낮에는 그토록 맑은 하늘이었는데, 저녁이 되니 도시에 짙은 안개가 자리잡았다. 이것 역시 새로운 광경이었다. 어제 저녁, 유난히도 어두웠던 건 바로 이 안개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가 피어나니 색다른 분위기가 연출됐다. 이토록이나 한결같이 놀라운 도시라니. 피란, 피란, 피란. 이곳을 관광한 첫 날임에도, 벌써부터 며칠 후의 헤어짐이 아쉬워졌다. 모든 인연에는 이별이 있다지만, 그 사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연도 있다. 피란이 그렇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도 싶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해, 라는 넬의 '섬'이 생각나 이 음악을 계속 들었다. 당연히,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도 넬의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