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피란 (2016~2017 세계 여행)
벅찰만큼 아름다워서
휴양지에 왔으니, 휴양을 했다. 어떤 근심도, 당위도, 압박도, 후회도, 원망도, 원한도, 분노도 없는, 그런 휴식이었다. 피란은 낙원을 퍽 닮은 곳이다. 낙원에 가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낙원이 있다면 아마 대충은 이런 모습이리라 감히 추측해볼 수 있었다. 아주 느즈막한 오후에 일어나, 숙소 밖 풍경을 바라보며 맥주부터 마셨다. 모든 것들로부터 진공 상태가 된 듯한 느낌이 다소 낯설었지만, 그 낯섦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가 지났음에도 전날의 경이로움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런 세상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게 조금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침대 위에서 한참을 밍기적거렸다. 남아도는 걸 버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없다. 나한테는 시간이 넘친다. 그 시간을 한껏 게으르게 소비했다. 서두르거나, 부지런 할 어떤 이유도 없는 날이었고, 또 그런 곳이었다. 어제 남은 고기를 점심으로 구워 먹었다. 요리, 라고 하기에는 사실 조리에 가깝기는 하다만, 어쨌든 이 요리가 거듭될 수록, 조금씩 '간 맞추는' 재미를 알아가는 것 같다. 3일 정도 요리를 해 본 베테랑의 입장에서 보면, 왜냐하면 정말 베테랑 셰프들은 설거지 같은 건 이제 안 할테니, 정작 귀찮은 건 요리 자체보다는 설거지다. 쌓인 그릇을 보며 젓가락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이게 혹시 마법 지팡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럴리는 없었다. 결국 하나하나 설거지를 해야 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자고, 먹고, 또 자는, 정말 행복한 백수 라이프였다. 모처럼 만에 잘 터지는 와이파이가 반가웠다. 독일 로스토크에서부터 슬슬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던 와이파이는, 이 후 동유럽을 거치며 정말 개판의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이 곳 숙소의 와이파이는 아주 훌륭하다. 피란이 워낙 접근성이 지랄맞은 곳이라 인터넷이 제대로 될 거란 기대조차 없었는데, 의외로 여행 중 가장 훌륭한 네트워크 환경을 보유하고 있었다. 접근성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일 모레 이동할 루트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음, 역시 지랄맞았다. 제 때 제 때 환승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곳으로 오는 길에 버스와 기차가 연달아 연착해버리는 불상사를 경험했던 지라 아무래도 조금 불안하기도 하다. 여행 중 도시의 이미지는 첫 인상에 많이 좌우된다. 첫 인상은 별 게 아니다. 숙소까지 무사히 당도했는지와, 그 숙소의 상태는 멀쩡한 지가 주된 판단 기준이다. 영국을 여행할 때 맨체스터의 호스텔은 사상 최악의 시설을 자랑하던 중이었다. 화장실의 상태가 특히 아주 개판이었다. 불행한 건, 내가 몇 안 되게 깐깐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화장실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나는 공중화장실의 재앙적 모습과 냄새가 두려워, 아무리 급해도 일부러라도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던 사람이었다. 훈련소에 처음 입소하고, 가장 두려웠던 건 다름아닌 화장실이었다. 사실상의 담력 훈련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상태를 견지할 수는 없겠으나, 얼마나 적당히 제 정신이 아니여야 변기물을 내리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이코패스들은 정말 우리 주위에, 아주 가까이 실존한다. 맨체스터의 화장실은 훈련소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 도시에 도무지 행복한 추억을 가지기 힘든 결정적인 결격 사유들 중 하나다.
숙소의 상태 만큼이나 중요한 게 숙소까지의 접근성인데, 피란은 이 부분에서는 최악에 가까웠다. 이 긴 여행들 중 최초로 예약한 교통편을 놓치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란은 단 5분 만에 내 인생 최고의 도시로 자리잡았다. 이 곳이 얼마나 훌륭한지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구글 지도를 봐도, 이곳까지의 접근이 그리 쉽지는 않겠다는 걸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다. 피란은 정말로, 슬로베니아의 해남 같은 곳이다. 이 곳까지 이어지는 철도도 없다. 수도인 루블랴나에서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내가 놓쳤던 그 버스를 타지 않으면 굉장히 일정이 복잡해진다. 게다가 그 버스의 배차 간격이 상당히 긴 편이기도 하다. 차선책으로는, 루블라냐에서 코페르라는 도시로 기차를 타고 이동한 다음, 거기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오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이 기차나 버스나 모두 완행이다. 슬로베니아의 국토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빙빙 돌아가다 보니 꽤 긴 시간이 소요된다. 크로아티아에서 슬로베니아로 넘어오는 버스의 연착이 너무 치명적이라서 다소 묻힌 감이 있지만, 루블랴나에서 출발했던 기차도 40분 정도 연착되었다. 이 정도가 되면, 도대체 좋은 마음과 감정을 가질래야 가지기도 아주 힘든 곳일텐데, 피란의 완벽함은 이곳에 오기까지의 고생을 하나의 '서사'로 승화시켰다. 이 정도 되는 곳에 오려면, 뭐 그런 정도의 고난과 시련은 가벼운 축에 속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까지도 들었다.
정말로, 숙소 밖을 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는 조증에 걸린 사람처럼 거리 여기저기를, 조금은 추한 모습이기도 했지만, 다다다 뛰어 다니기도 했다. 전 날 저녁에는 짙은 안개가 끼었는데, 오늘 오후는 상당히 맑은 편이었다. 그래서 어제 보지 못했던 야경을 볼 수도 있었다. 아, 야경마저 아름다운 이곳이라니. 사실 오늘에는 관광을 길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마음껏 시간을 버리며 쉴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기에, 그냥 밍기적거리다 하루를 마치려고 했다. 하지만 물을 사러 숙소를 나섰다가, 해질녘의 광경에 아주 큰 감동을 받고, 숙소에 다시 올라가 맥주 두 캔을 꺼내서 나왔다. 바닷물은 저녁에도 선명하고 투명했다. 몇몇 사람들은 이 고요한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는 중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관광철이 시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이 곳의 지명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그런지, 피란의 바닷마을은 굉장히 평화롭고도 안온한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다. 최근 한국에서 인기 관광지로 급부상한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근시일 내에 슬로베니아의 피란도 상당한 유명세를 떨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추측도 들었다. 그 전에 이 곳에 와서 참 다행이다. 아직은 물가도 저렴하고, 또 조용하고도 한적한 분위기가 정말 좋다. 건너편의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걸 지켜보며 맥주를 마셨다. 맥주가 아닌 소주를 마셨어도 상당히 맛있게 느껴질 만한 그런 풍경, 까지는 못 되었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풍경이 조금 별로였다는 게 아니라, 소주가 워낙 형편 없는 술이라는 소리다. 가끔씩 한국 음식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그리고 막걸리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소주를 그리워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대학교 초년생 시절에는 어떻게 그 술을 감당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요즘의 오티나 새터에서는 과일 소주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어디선가 접한 적 있었다. 역시 윤리의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었다.
오티와 새터를 갔던 게 도대체 얼마 전이었던가. 불이 켜지는 야경을 지켜보며, 나의 스무살을 떠올려보았다. 매 순간이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게 아무런 생각없이 매 순간을 살아낼 수 있던 날들이 문득 그리워지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회한과 아련함에 가득찬 감상을 갖기에는, 나에게는 다닌 학기보다 남은 학기가 더 많다. 세상에나. 학교로 돌아가면, 과일 소주가 아닌 그냥 소주로 오티와 새터를 즐겼던 동기, 혹은 전우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동기들 중에는 벌써 졸업을 한 친구들도 있다. 이 나이에 졸업이라니. 이토록 험한 세상에 벌써부터 발걸음을 내딛은 그들이 정말 멋지다. 한 뼘이라도 더 멀리 발걸음을 뻗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다른 동기들도 정말 존경스럽고. 어떻게 그렇게나 삶에 진지하고 성실할 수 있지. 괜시리 혼자 한가하게 인생을 직무유기하고 있는 듯하여 어쩐지 조금 겸연쩍어 진다. 한 서른살이 될 때 까지, 대학생의 신분은 유지하면서 공부와 취업 준비는 안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미래 생각만 하면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어쩐지 이런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는 이런 속물적인 생각을 하면 안 될 듯 하여 그저 얌전히 감상했다. 옆의 한 청년은 플라잉 피시 비슷한 걸 계속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자리를 뜰 때 까지 물고기를 잡지는 못 한 듯 했는데, 그래도 그 여유로움과 한가함이 내게도 느껴져 즐겁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떠오르기도 했다. 봐야지 봐야지 해놓고 아직 못 본 영화인데, 스틸컷에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피란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지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정말 따스했고 좋았다.
뭐, 세상사야 어떻게든 굴러가겠지. 원래 삶이라는 게 긴 여행이고, 지금은 정말 문자 그대로의 '긴 여행'을 하는 중이니, 일상이 아닌 이 곳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깊이 고민한다고 반드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본분은 여행자니, 오직 이 순간에 충실할 뿐이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Olafur Amalds의 'Near Light'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