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피란 (2016~2017 세계 여행)
행복한 추억만을 안고
어느새, 피란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떠나가는 게 여행자의 일상적인 숙명이란걸 잘 알면서도 속절없는 아쉬움을 감추기는 힘들었다. 부산스럽게 준비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 건물의 모퉁이를 돌면, 바다 내음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이게 참 좋다. 조금은 비린 듯한 이 냄새. 코를 간질이는 그 향을 계속 맡았다. 향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날이 좋든 아니든, 낮이든 저녁이든, 가릴 것 없이 아름다운 곳이 바로 슬로베니아 피란이었다. 부둣가에 나서면, 실제로도 어업에 활용되는 듯한 배들이 많이 보이기도 했다. 정말로 바닷마을, 그 자체였다. 바다 향을 이렇게나 잔뜩 머금은 곳에서 지낼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든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너를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거야, 피란.
피란은 무척이나 작은 바닷마을이다. 넉넉잡아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한 바퀴를 다 돌아볼 수 있다. 도시 뒷편의 바닷가로 가니, 여기에는 다소 짙은 안개가 서려있었다. 그럼에도 물은 정말 맑았다. 바위에 걸터 앉아, 숙소에서 챙겨 온 오렌지를 하나 까먹었다. 어쩐지 이 오렌지에서도 바다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술이든, 음식이든, 정말 중요한 건 분위기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다 보니 누구와 '함께' 마시거나 먹을 일은 별로 없고, 자연스레 분위기에 따라서 그 맛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피란의 경우는, 영화 <아가씨>의 한 OST 트랙 제목 만큼이나 '극상의 쾌락'이다. 생각해보니, 그 영화에서 하정우가 복숭아를 참 맛있게 먹기도 했는데. 오렌지가 아니라 복숭아였어도, 그저 맛있었을 듯했다. 가만히 앉아 오렌지를 먹다, 문득 바닷물의 촉감은 어떤지 궁금해져, 손을 담궈보았다. 생각보다는 그렇게 차갑지는 않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두 발을 모두 물 속에 넣어보기도 했다. 조금 차가웠지만, 그래도 얼음장같은 차가움까지는 아니어서, 조금은 첨벙첨벙도 해 볼 수 있었다. 여름에도 참 매력적인 도시일 듯했다. 이렇게, 피란을 기억할 수 있는 감각이 하나 더 생겼다.
저녁으로는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숙소 근처의 음식점에서, 샐러드와 생선 요리를 하나씩 주문했다. 며칠동안 고기만 먹어댔더니, 샐러드의 향긋함이 갑자기 좋아졌다. 나이가 들면서 식성이 변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인 듯 하다. 단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샐러드가 '메뉴'의 일부일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건 이를 메뉴로써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풀쪼가리를 어떻게 식사라고. 사람의 탈을 쓴 초식 공룡들인가, 뭐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그땐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샐러드의 맛이 좋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기억 상으로는, 아주 친한 친구와 함께 둘이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세트 메뉴를 먹을 때 부터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 친구가 좋았는지, 아니면 샐러드의 상큼함이 유독 돋보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이젠 몸을 챙길 나이게 됐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때 이후로 샐러드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줄어들었다. 토마토와 양파 등이 나왔는데, 여기에 발사믹 소스를 뿌려 먹으니 은근히 맛있었다. 뭔가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메인 유리가 물고기 요리라고만 적혀있어서 어떤 메뉴일지 궁금했는데, 생선 구이가 나왔다. 나는 구이보다는 회가 더 좋긴 한데, 그래도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생선 구이를 먹게 되었다. 생선 구이에 대한 어쩐지 모를 꺼림직함은, 학교와 군대를 관통해온 급식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아, 나는 진심으로 그곳의 영양사들에게 읍소하고픈 마음이었다. 실력도, 자신도, 대책도, 돈도 없으면, 함부로 생선 요리는 손대지 말라고. 쌈마이 고기에다가 적당한 제육 양념만 들이부어도 그런대로 괜찮으니, 제발 생선은 좀 내버려두라고. 되도 않은 생선 요리가 나올 때마다, 나는 항상 분노하곤 했다. 그 때문에 생선 구이는 별로 안 좋아했는데, 막상 또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니 의외로 맛있어 보이기도 했다. 우선 살점이 도톰하여 마음에 들었다. 한 점 크게 맛을 보았다. 음. 간을 하지는 않았는지 다소 심심하고 삼삼한 맛이었지만, 담백한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입에 그런대로 잘 맞았다. 밥 한 공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아저씨, 여기 햇반은, 당연히 없겠죠. 나중에 이 곳으로 다시 올 기회가 된다면, 나도 낚시나 해서 매운탕을 끓여먹어야 겠다는 소박한 계획을 세웠다. 아, 매운탕. 정말 오랜만에, 아주 먹고 싶어진 한국 음식이다. 생선 구이의 양이 은근히 많아, 아주 배 부르게 잘 먹었다.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되어 더욱 훌륭한 식사였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조금 쉬다가, 며칠 전 사놓았던 화이트 와인 한 병과 청포도 한 팩을 들고 주변 부둣가로나섰다. 그 끝에 그냥 걸터앉아, 가져 온 와인과 청포도를 마셨다. 이 한 병이 채 6,000원이 안 된다. 도대체, 한국의 와인들은 왜 그리 비싼거지. 이 정도 가격대만 되어도, 가성비도 괜찮아 모든 소주들을 몰락시킬 수 있을텐데. 일몰을 지켜보며, 피란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소박하게 기념했다. 정말 많은 감탄사로도, 그래서 비속어들까지 섞었음에도, 차마 다 수식할 수 없던 첫 날의 감흥이 아직 생생했다. 처음의 경이로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격한 우하향 그래프를 그리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피란은 예외였다. 그래서 더 떠나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런 곳에서 나중에 아예 거주를 해도 참 좋을 듯했다. 어쩐지 피란 때문에, 앞으로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될 것 같다. 그 모든 환상의 원형과 기원이 이 곳 피란이라는 사실이, 참 좋았다. 와인 한 병을 다 비우니, 조금은 취기가 올라왔다. 건너편의 조명들도 때 마침 함께 켜지고 있었는데, 괜히 조금 울컥하고도 뭉클한 순간이었다. 알코올은, 이렇게 감상과 감정에 푹 빠지고 싶을 때 큰 도움을 준다. 술을 권하는 풍경이기도 했고.
내일의 이동을 위해 짐을 다시 정리해야 했다. 한껏 어지른 짐들은 정리하려니, 다소간의 귀찮음이 몰려왔다. 아 정말, 뭐든 어지르고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습이야말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일의 본질일 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확실히 나이가 들수록 수습해야할 것들이 늘어나기는 한다. 그 사이 정이 들어버린 이 숙소도 내일이면 비워줘야 한다. 다소간의 공허감, 혹은 허탈함이 들어 쇼파에 멍하니 앉아 음악을 들었다. 음,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감성적인 사람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게으름 때문에 그냥 쉬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노래를 들으며 내가 슬로베니아 행 비행기를 다시 타는 날은 과연 언제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꽤나 큰 먹먹함과 막막함이 찾아오기도 했다. 아주, 아득하게나. 이토록 아름다운, 정말 오직 아름다움 뿐으로 남을, 그런, 피란. 늘 즐거운 놀람들의 연속이었던, 그런, 피란. 오래도록 기억할 추억이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나, 기억 속에서만 한 도시를 추억하게 되는 건 슬픔에 가깝다. 그렇게 조금은 슬픈 마음으로, 내일 있을 작별을 마저 준비했다. 귀찮음과 번거로움이, 슬픔을 미약하게나마 가려주기도 했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Andrew Bird의 ‘Sovay’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