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만족스럽진 않지만

슬로베니아 피란-블레드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자꾸만 직전 도시가 생각나는 건

이럴 줄 알았고, 이럴 줄은 몰랐다. 피란을 떠나오며, 당분간은 이 만한 감흥을 느끼기 힘들겠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음 여행지인 블레드 역시 예쁘다는 소리를 워낙 많이 들은 곳이었고, 그래서 피란에서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유효한 긍정적임을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블레드는, 조금 큰 버전의 일산의 호수공원같은 느낌일 뿐이다. 심지어 피란으로 갈 때와는 다르게, 블레드로 오는 버스들은 어떠한 연착도 없이 무사히 잘 환승되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할 때 다소간의 오류가 있긴 했지만, 이것 역시 어쨌든 무사히 잘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관광지 외적으로 내게 짜증을 줄만한 요소들은 거의 없었다. 그 만큼 피란의 감흥이 강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란에서 블레드로 5시간 정도 달려온 여독을 잠시 풀고, 블레드 호수로 나섰다. 마침 날도 좋았다. 슬로베니아로 와서는 좋지 않은 날이 없다. 오늘 역시도, 조금은 더운 축에 속하는 날씨었다. 세상에, 아직 4월도 안 됐는데 이렇게 연이어 '더움'을 느끼고 있다니. 어쩐지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혹독하게 다가올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벌써부터 들었다. 블레드 역시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라, 호숫가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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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3_100353_017.jpg 피란, 안녕.

가는 길에 숙소 근방을 구경하기도 했는데, 시골도 이런 시골이 또 없었다. 시골에서만 날 듯한 냄새들도 느낄 수 있다. 시골의 냄새에는 동서양의 차이가 굳이 없는 모양이었다. 며칠동안 바닷가 근처에서만 생활해서 그런지, 유난히 이 시골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한적하기 짝이없는, 그런 시골에 위치한 숙소였다. 가로등도 몇 개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해가 완전히 기울기 전에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피란에서보다 꽃이 더 많이 보이기는 했다. 언제나 그랬듯 급할 건 없으니, 천천히 터벅터벅 호숫가로 걸어갔다. 천천히와 터벅터벅, 이 둘이 몹시도 좋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이만한 미덕이 또 없다. 얼마 전, 손석희 앵커의 '지각인생'이란 글을 다시 읽었다. 절실함이 있었기에 후회는 없다고 그는 말했는데, 천천히 터벅터벅에는, 절실함 조차 없다. 그냥 지각 걸음이다. 조금 더 방랑에 가까운 걸음이고, 삶이랄까. 우선 정해진 목적지 같은 게 없다. 따지고 보면 여태까지의 삶은, 중간중간의 목적지에 안전히, 무사히, 그리고 제 때에 당도하기 위해 복무하던 시간과도 같았다. 고등학교 입시든, 대학 입시든, 아니면 전역이든.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다는 건, 하나의 당위가 있다는 것과 같다. 이 여행에서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언제 돌아갈 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갈 지 조차 모르는 이 여행에서는, 목적도, 당위도 없다. 그 동안의 인생과는 퍽 대조를 이뤄, 익숙한 삶의 관성과 때때로 충돌하는 걸 느낄 때도 있다. 관성의 무게보다는, 방랑의 여유가 선물하는 자유로움이 아직은 더 좋다. 그 때문인지, 아직은 귀국의 '귀'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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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3_170803.jpg 숙소 주변의 한적한 마을

블레드 호수는, 그 동안 들어왔던 것과는 다르게 크게 볼 것이 많지는 않았다. 해가 지는 때라서, 그래서 역광이 강하게 비추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구글에 슬로베니아 여행을 검색하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게 바로 이 블레드 호수다. 말하자면 슬로베니아라는 앨범의 타이틀 곡이자, 아이돌 그룹의 센터인데, 기대가 너무 커서 그랬던지, 큰 감흥이 와닿지는 않았다. 예쁘기는 했다. 분명 예쁜 풍경에 속했다. 하지만 그렇게도 들어왔던 '동화같은'이라는 수식어가 그리 적합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아마 다음 날 오전에 다시 나가 보면 그 느낌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여행 일 수가 늘어남에 따라, 제일 먼저 깨진 환상들 중 하나가 '동화같음'이다. 어쩐지 이 '동화같다'는 수식어는, 자연에 위치한 아기자기한 이국적임을 묘사하기 위해 여기저기 남발되는 느낌이다. 본격적인 유럽 여행을 북유럽에서 시작했던 나는, 노르웨이나 스웨덴, 그리고 덴마크를 거치며 '동화같음'에 대한 환상을 하나 둘 씩 잃었다. 여기나 저기나 다 동화같다고 하는데, 막상 그 곳을 가게 되면 다른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한 느낌만을 받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여행 초창기에 이 곳을 방문했다면, 블레드 호수에도, 우와, 하면서 감상할 수 있었을 듯하다. 하나하나보면 이 곳도 그리 못난 곳은 아니었다. 다만 직전의 피란이 워낙에 충격적일만큼 아름다웠던 곳이고, 또 '동화적'이라고 자부하는 도시들을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참 아쉽게도 감흥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런 게 장기 여행의 단점일 지도 모른다. 비슷한 것들을 많이 봐 오며, 어쩔 수 없이 감정이 무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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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3_175223(0).jpg 블레드 호수
20170323_175259_003.jpg 멀리 보이는 만년설
20170323_175805(1).jpg 호숫가의 해질녘

호숫가를 조금 돌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우체국 하나를 발견했다. 이제 서서히 캐리어 가방을 한국으로 부쳐야할 때가 다가온 지라, 들어가 가격을 확인했다. 생각보다는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또 그렇게 싼 가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반드시 부쳐야 하고, 본격적으로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까지 배낭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니, 이 곳에서 가방을 부치기로 결심했다. 방에 들어오니 캐리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욕을 해댔는데, 막상 또 작별을 준비하려니 어쩐지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길 같지 않은 길들을 함께 다니느라, 이 친구의 수명은 서서히 다해가고 있었다. 바퀴에서는 어떤 쌩쌩함도 찾아볼 수 없다. 굳이 분류하자면 '고물'일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또 정이 있어서, 괜한 애틋함이 피어났다. 얘와 작별할 시간이 오리라고는, 더 정확히는 이 친구를 먼저 한국으로 돌려 보내야 할 만큼 오랜 시간 여행을 할 거라고는, 둘 다 생각지 못했었다. 캐리어 안의 모든 걸 다 끄집어 내었다. 여행의 매 순간이 행복하다는 사람은, 정말 진지하게, 친해져서는 안 될 사람이다. 여행 중에는 차려주는 고기를 맛있게 먹기만 하는 때가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직접 푸줏간 주인이 되어 살을 도려내야 하는 번거롭고도 지리멸렬한 순간도 존재한다. 캐리어의 짐을 배낭에 옮겨담는 일이, 말하자면 그런 작업이었다. 어느 정도의 해결을 보긴 했지만, 아마도 곧 이른 시일 내에 더 큰 배낭을 하나 장만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한 직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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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3_182107.jpg 오후, 아주 한적한 마을의 풍경

짐을 싸는 걸 우선 크게만 마무리하고, 이것저것 나머지들을 정리하며 맥주를 마셨다. 이 숙소에는 테라스가 붙어 있다. 그냥 나가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테라스에 나섰는데, 세상에, 아주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스웨덴 아비스코에서 오로라를 볼 때 워낙 고생했던지라, 그 이 후로 밤하늘 같은 것에는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고 지내왔는데, 테라스로 나서자마자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별을 보며 맥주를 마시니, 어쩐지 새로운 느낌이었다. 테라스에서, 별을 보며 맥주를 마실 만큼, 이 곳이 따뜻한 날씨이기도 했다. 아비스코였다면, 맥주부터 먼저 얼었겠지. 오로라를 본 것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그 곳의 눈은 여전한 공포로 남아있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이라니. 세상에나. 눈이 그렇게 무서울 줄 누가 알았을까. 기대했던 호숫가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밤 하늘의 별 덕분에 오늘은 꽤 괜찮은 하루가 되었다. 정말 뜻하지 않았던 별이라서, 더 선물처럼 느껴진다. 밤이 짙어질 수록, 별이 더 빛나는 듯 하기도 하고. 여행의 즐거움은, 이런 의외의 순간들에 있다. 여행을 하며 쉽게 실망할 이유가 없는 건, 바로 언제 찾아올 지 모를 이런 의외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영화 <Like Crazy>의 OST이기도 했던, Dustin O'Halloran의 'Twin Star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