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캐리어

슬로베니아 블레드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길이 좋아서, 길이 좋지 않아서, 길이 적당해서

캐리어와 작별했다. 짐을 토해낸 캐리어는 무척이나 날씬했다. 여행 내내 나를 가장 육체적으로 힘들게 한 존재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금은 앙상해 보이기도 했다. 텅 빈 캐리어는 가벼웠다. 여행 중의 마지막 운행이었다. 마지막 만큼은 캐리어의 바퀴가 잘 굴러갔다. 덕분에 편하게 우체국까지 닿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캐리어와 함께하는 여행은 이번이 마지막일 테다. 12년을 함께해 온 캐리어가, 이렇게 정년 퇴직을 하게 되었다. 캐리어를 끌며, 경춘선의 마지막 무궁화호를 운전했던 기관사의 심정을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는 무슨. 캐리어와 작별하는 슬픔보다는, 이제 짐을 어떻게 싸야하나 하는 막막함이 압도적으로 밀려왔다. 그렇게 욕을 해대면서도 지금껏 이 캐리어를 끌고 다녔던 건, 캐리어가 수납에 있어서만큼은 배낭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편리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 부로, 나는 문자 그대로의 '배낭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건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다른 차원의 난이도다. 캐리어와의 이별이 슬프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편안함이 떠나간다는 사실은 조금 아쉬웠다. 가방 안에는 그 동안 내내 신었던 운동화와, 겨우내 나를 지탱해주었던 패딩을 함께 담았다. 최근까지만 해도 항상 입고 다녔던 패딩이었다. 런던 다리위에서 일곱 시간 동안 새해 불꽃놀이를 기다릴 때나, 스웨덴 아비스코에서 오로라를 볼 때나, 이 패딩이 있어 조금이라도 덜 추울 수 있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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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4_115638.jpg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끌고

캐리어를 한국으로 부치는 절차는, 생각보다는 복잡했고, 동시에 생각보다는 단순했다. 송장을 작성하는 일이 조금 까다롭긴 했다. 현지 우체국 직원은, 해외로 짐을 보내 본 경험이 거의 전무한 듯했다. 이 가방을 한국으로 보내겠다는 나의 말에, 꽤 당황한 것이 내게까지 느껴졌다. 직원은 급히 매뉴얼 책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송장의 항목들이 죄다 슬로베니아 언어라, 직원은 매뉴얼을 익히랴, 내게 송장을 해석해주랴,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쩐지 그녀에게 괜히 벅찬 요구를 한 듯 하여 다소 미안했다. 송장을 작성하는 데 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막상 이를 다 적고 나니 이 후의 절차는 허탈하리만큼 간단했다. 송장을 기반으로 바코드 몇 개를 찍었고, 요금을 결제하고 가방을 받아가니, 그걸로 끝이었다. 80일 이상을 함께해 온 캐리어가, 이제는 스스로 바다 건너의 우리 집으로 여행해야 될 시간이 되었다. 잘 가, 라는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한국에 귀국하여 마주하게 되면 상당히 반가울 듯했다. 짐을 부치고나니, 다소간의 허무함과 홀가분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앞으로의 여행 동안 캐리어가 없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게를 끄느라 힘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반갑기도 했다. 물론 배낭이 그 보다 더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만은. 허무함은, 허기로 이어졌다. 어제 저녁부터, 기필코 오늘은 피자를 먹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가끔씩은 이렇게 피자가 끌릴 때가 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피자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블레드 호수 주변으로 가서, 피잣집을 찾아보았고, 한 곳에 앉았다.

20170324_122906.jpg 노천 식당

피자 가격이 너무나도 싸서 밀가루 범벅만 나오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딱 인스턴트 피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피자였지만, 맛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피자가 맛 없기도 힘들기는 하다. 호수가 살짝 보이는 노천 자리에서, 가득한 일조량을 받으며 식사를 즐겼다. 이번 여행 중 일조량만큼은 블레드가 최고인 듯하다. 해가 짱짱하다 못 해, 선글라스를 착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슬로베니아의 얼굴이라 불리는 여기 블레드 호수는, 소박한 매력이 깃든 곳이다. 조금이라도 더 푸른 날에 왔다면, 훨씬 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직전 도시였던 피란이 워낙 아름다워서 그렇지, 이 곳에서도 따뜻하고도 예쁜 매력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밥을 먹었으니,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의무감이 들었다. 호수 건너편에는 블레드 성이 있었다. 절벽 위에 위치한 성이었다. 어쩐지 도전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곳이기도 했다. 첫 계단에 호기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만 해도, 그 곳이 그렇게나 벅찬 장소일 지는 몰랐다. 숨이 찼다. 내 체력이 워낙 궁핍한 것도 있겠지만, 여긴 객관적으로도 힘들긴 힘든 곳이었다. 절벽 위의 성이다보니, 경사가 꽤나 가파랐다. 제기랄. 역시 도전이란 건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헉헉대며, 등산 비슷한 짓을 했다. 20대 청년의 체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고, 나는 마치 히말라야라도 정복한 듯한 감흥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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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4_131442(0).jpg 바로 저 블레드 성. 절벽 위의 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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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4_133337_012.jpg 등산을 감행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블레드 성과, 성으로 올라가는 길

호수의 전망을 보기 위해 그 절벽을 올라온 것이었으나, 그렇게 또 특출난 광경은 없었다. 아, 존나 힘들다, 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물을 마셨다. 블레드의 호수는 예쁘고 아기자기하기는 하나, 정말 냉정히 이야기하면 일산 호수공원의 기시감이 자꾸만 들었다. 오히려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성의 풍경이 훨씬 더 예뻤다. 구글에 블레드를 검색하면, 상당히 에쁜 사진들이 나오는데, 오로라를 보러 갈 때 여실히 느낀 것이지만, 프로 사진가들은 정말 뭔가 다르기는 다르다. 여행이 계속되고, 사진 찍는 일이 늘어날 수록,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도 등산 아닌 등산을 한 덕분에, 칼로리 소모는 제대로 된 듯 했다. 블레드 호수는, 누군가는 요정의 마을이라고까지 칭했을 정도다. 자세히 보면, 그런 면모가 아예 없지는 않다. 이 곳 자체가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호수를 둘러싼 산맥에는 만년설도 보인다. 이건 조금 이국적이기는 하다. 블레드에서 가장 매력있는 건, 오히려 그런 알프스를 볼 수 있는 숙소 근처의 마을이다. 이렇게나 목가적이고도 시골향이 잔뜩 느껴지는 마을에서, 저 멀리에는 눈이 있는 알프스 산맥이 보이고, 또 근처에는 블레드 성까지 얼핏 보이기도 하여, 은근히 다정하고도 멋지게 느껴지는 곳이다. 내가 언제 또 알프스 근처의 시골 마을에서 생활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스웨덴 아비스코에서 허리까지 차올랐던 눈의 깊이 때문에 눈이라면 아예 기겁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포근한 날씨에서 만년설을 바라보니 새삼 또 느낌이 새롭다. 워낙에 따뜻한 까닭에, 숙소 근처의 일부 나무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겨울 옷도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이렇게 풍성한 꽃도 보니, 겨울과 봄의 경계는 일찌감치 넘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20170324_134824(0).jpg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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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4_135603_007.jpg 이렇게 보니 '동화같은' 구석이 없지는 않다.
20170324_181925_005.jpg 다시 찾아온 일몰 시간대의 블레드 호수.

점심으로 먹은 피자가 부족했던 건가, 숙소 근처의 베이커리에서 피자 세 조각을 더 사왔다. 길 건너편의 주유소에 편의점이 있었고, 거기서 맥주를 몇 캔 사오기도 했다. 잠깐, 주유소에서 맥주를 팔아도 되는 건가. 어쨌든. 방에 돌아오니, 익숙한 캐리어가 보이지 않아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이 널부러진 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그저 암담함이 앞섰다. 배낭을 몇 번이나 휘적이며 이런저런 배치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마땅히 만족스러운 그림은 나오지 않는 중이다. 내 공간지각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라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대사에 희망을 걸어보았다. 답이 없더라도, 어차피 내일은 이 숙소를 체크아웃 해야 되기에 어쩔 수 없다. 정 안되면 남는 짐은 두 손 가득 들고 가야지, 뭐. 필요 없는 것들을 추리고 추려서 한국으로 보냈는데, 그럼에도 짐이 너무도 많다. 해리포터였나, 어떤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용량이 무한한 주머니를 본 기억이 있다. 내 배낭도 그러면 좋으련만. 무한하기는 무슨. 이렇게 야박할 수가 없는, 쪼잔하고도 졸렬한 배낭이다. 캐리어가 떠나니, 이제는 배낭이 욕 먹을 차례인 건가. 이쯤되면 내 인간적인 품성의 문제 같기도 하고. 뭐, 혼자 다니는 여행이다 보니, 불평을 쏟아낼 곳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되기는 하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Charlie Puth의 'We Don't Talk Anymore'이다.


아무튼 캐리어야. 한국으로 잘 돌아가렴. 길이 좋아서, 길이 좋지 않아서, 길이 적당해서, 그렇다고 너와 함께한 모든 날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을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