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별자리를 그려본 날들

슬로베니아 블레드-독일 뮌헨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눈이 부시게 기억될

이제 여행은 끝났고, 고생, 또는 고행만 남았다. 그저 까마득했던 순례길이 정말 코 앞으로 다가왔다. 따뜻한 봄날에, 뜨거운 땀을 비질비질 흘릴 날들을 생각하니 조금은 아득하고, 실은 상당히 암담하다. 이성이 아주 멀쩡한 상태로도,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닌 짓들을 기어코, 겁도 없이, 선택하곤 한다. 경제학, 또는 경영학이 현실과 괴리가 있는 건, 인간의 이런 '비이성적인' 성향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배낭이 가장 문제다. 그리 많은 짐도 아닌데, 그렇다고 배낭에 다 담을 수도 없다. 그 차이가 굉장히 적은 편이라, 새 배낭을 구매하기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버릴 것들은 다 버렸고, 보낼 것들은 다 보냈다. 짐을 더 줄이는 건 불가능하다. 순례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새 배낭을 하나 사야되는 데, 출발지인 생장까지는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는 일정이라, 그럴 시간이 있을 지나 모르겠다. 뮌헨으로 오는 버스가 한 시간 십 분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이 곳에는 야밤에 도착했다. 더 최악은, 내일 아침에 마르세유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여, 그렇기에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어쩐지 이 놈의 순례길은 시작부터 겁나게 빡센 느낌이다.


거의 90일에 가까운 여행 동안 스스로에게 가장 뿌듯한 건, 우선 일신 상에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무탈함이고, 그 다음으로는 여행기 쓰는 것을 이틀을 넘겨 미루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팔자에 안 맞게 너무 부지런하게 살았다. 가끔 늦잠을 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내가 얼마나 게으른 천성의 사람인지 새삼 놀라곤 했다. 그럼에도 계속 글을 쓴 건, 장하디 장하다. 이건 다, 여행을 혼자와서 그렇다. 시간이 너무 많다. 막상 글을 쓸 때는, 무척, 엄청, 아주, 대단히, 몹시, 매우, 상당히 귀찮고 지루했던 적도 많았다. 여행한 날들이 길어질 수록, 가끔은 감상과 생각을 쥐어 짜내야 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 덕에, 조금은 더 많이, 또 풍부하게 여행지를 음미하게 된 경우들도 있다. 얼마 전 방문했던 슬로베니아의 피란처럼, 그냥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벅찬 감동을 주는 여행지가 있었던 반면, 때로는 노력하고 찾아야만 기어코 그 진가를 맛 볼 수 있던 곳들도 존재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내 감정 세포들을 채근하다 보면, 도시의 매력을 약간이라도 더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을 하며, 숙소로 돌아가면 이걸 또 글로 써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꽤나 큰 귀찮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더 적확히는, 글을 쓰려고 여행을 하나,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래도 글을 계속 썼던 건, 역시 시간이 너무 많아서, 정말 남아 돌 만큼이나 시간이 많아서였고, 그리고 그 남는 시간 동안 지난 여행기들을 돌아보는 게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40일이 시작되었던, 더블린으로 가는 배 위에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독일 뮌헨까지의 여행기는, '여행의 천문학'이라는, 지나치게 거창한 제목으로 작성되었다. 영국 여행기의 제목을 '방랑과 방황의 경계에서'라고 지으며, 앞으로의 여행기들도 넬 노래들의 제목이나 가사에서 착안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여행의 천문학'은, 가을방학의 '한낮의 천문학'이란 노래를, 표절, 비슷하게 벤치마킹한 이름이다. 뒷통수도 많이 맞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악동이 아닌 천사같은 모습으로 내게 길 안내를 해주는, 그래서 무척이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구글 지도에서, 여행 중 방문했던 곳들에는 '별표'를 붙이곤 했다. 처음 영국 여행이 마무리 되고 그 별들을 보는데, 내가 다녀온 루트를 별들을 따라 그려보니 그게 마치 별자리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이건 잉여 시간과 감정 과잉이 만들어낸 감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여행이라는 것도 어쩌면 별자리를 찾아내고 이름 붙이는 일과 비슷해 보였다. 이렇게 말하면 천문학에 대단한 관심이 있어 보이지만, 나는 대학시절 유일하게 수강했던 이과 과목 '우주의 이해' 강의에서 자랑스럽게도 C학점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 만큼 천문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예도, 관심도 없기에, 구글 지도에서 이런 섣부른 연상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내가 가을방학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들의 노래들 중에 '한낮의 천문학'도 있으며, 가장 중요한 건 이미 아일랜드 더블린에서의 첫 날 여행기는 써놓았는데 썩혀 두는 게 찜찜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여행의 천문학'이란, 다소 되도 않은 제목을 붙여 보았다.

더블린 템블바
Cliffs of Moher
킬라니 국립공원
Rings of Kerry
노르웨이 베르겐
노르웨이 보스바겐
노르웨이 오슬로
스웨덴 스톡홀름
스웨덴 아비스코
덴마크 코펜하겐

그러니 이미 저질러버린 이 제목에 대해 조금만 더 '꿈보다 해몽' 같은 소리를 해보자면, 별자리라는 것이 사실은 이미 존재하는 별들을 잇고 나름의 서사를 구현해낸 결과물인 것처럼, 이번 여행에서 각 도시들을 돌아다닌 동선을 이어보면 이것이 마치 별자리처럼 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시간 동안의 여행은 삶의 별자리를 그려보았던 날들이었다. 맙소사, 이것 역시 너무 되도 않게 거창한 표현이긴 한데. 하지만, 누군가가 내 젊음에, 혹은 청춘의 한복판에 무엇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별자리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특히, 영국을 떠나 슬로베니아로 오기까지의,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던 이 시간이 유난히 많이 빛날 듯하다. 경직될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영국 여행 때에 비하면, 그래도 타지에서의 생활이 조금은 더 익숙해졌고, 덕분에 더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날이 점점 더 따뜻해진 것도 고무적인 변화들 중 하나였다. 물론 이 일정 중에서는, 액체라고는 존재할 수 없던 스웨덴 북부의 아비스코도 포함되어 있긴 했다. 그 흔한 '군대에서 눈 치워본 경험' 한 번 없는 내가, 눈에 대해 기겁하게 된 건 순전히 그 날 때문이다. 어쨌든 그 곳을 정점으로, 북유럽에서 동유럽으로 넘어오며, 더욱 온화한 기후에서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이 길어지니 한 계절을 겪어냈고, 또 한 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은 정말 한심할 뿐이었던 대학교 1학년 때도 안 들었는데, 지금이 어쩌면 내 삶의 화양연화일 수 있겠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분명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서부터, 40일간 돌아다닌 이 날들의 별자리 이름을, '화양연화'로 붙일 듯하다.


체코 프라하와 오스트리아 빈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곳들이 처음 방문하는 도시들이었다. 분명 유럽 여행인데, 오히려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 국가들도 이번 일정들 중에는 더 많았다. 그렇게, 다양한 화폐 만큼이나 다양한 유럽의 얼굴들을 마주해 볼 수 있었다. 오직 눈만 가득했던 곳도 있었고, 정말 아름답고도 작은 바닷가 마을도 있었다. 최고의 도시는 물론 피란이었지만, 좋지 않았던 기억의 여행지는 없다. 때론 심심하고도 다소 지루한 순간도 물론 있었지만, 그리 길지 않은 간격으로 등장하곤 했던 기분 좋은 자극들에, 여행 중 가끔은 '행복함'에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행복함'은, '불행하지 않음'을 최선의 가치로 삶을 살아내는 내게 있어, 과분할 정도로 호사스러운 감정이기도 하다. 행복함의 전율과 따뜻함은, 누군가를 열렬하고도 뜨겁게 사랑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그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던 순간이기도 했다. 여행 전에는, 행복이라는 건, 결국 대체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삶에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환각제라 생각해왔다. 그런 개념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세뇌하고 또 세뇌하여, 미래와 인생 전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하려는, 다분히 짙은 의도로 구상된 허상이라 생각해 왔다. 언젠가는 다시 기어코 평범함, 혹은 불행으로 수렴, 또는 소멸해버리는 행복의 미약함을 바라보며, 결국 이런 것 따위는 세상에 없다고 단념해버린 적도 있었다. 이 여행의 매 순간이 행복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행복이라 부를 수밖에 없던 순간들이 있었고, 그 순간들은 얼마되지 않은 기억임에도 찬란히 빛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독일 로스토크
체코 프라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오스트리아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베니아 피란
슬로베니아 블레드

여행의 기억은, 결과론적인 관점으로 평가절하되거나 변질될 수 없기에, 앞으로 평생 꺼내보고 되뇌일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남을 것이다. 스웨덴 아비스코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었던 건, 우선은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이고, 환경적인 요인올 꼽자면 아비스코 주변에는 인공적인 불빛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정말 어둡고도 어두운 밤하늘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날의 밤하늘에는, 오로라 뿐 아니라, 수 많은 별들이 함께 빛나고 있었다. 돌아보면 유독 눈부신 이 여행이, 그 곳 밤하늘의 별들과 비슷하다. 이 여행을,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스웨덴 아비스코의 오로라와 별에 비유할 수 있어, 그래서 나의 감각들로 이 여행을 기억할 수 있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적지 않은 시간과, 상당한 금전적 출혈 때문에 아비스코로 갈까 말까 많이 망설였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잘 한 결정이었다. 해외여행이 많이 보편화 되었고 그 과정도 비교적 단순하게 되었지만, 막상 여행을 할 때 마다 느끼게 되는 건, 같은 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곳이 지리적으로 꽤나 거리가 있는 지역이라면. 아마 이 40일 동안 다녔던 여행지들 중 대부분도,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곳이 되겠지. 다음 여행은 역시 새로운 곳들을 위주로 계획할 테니까. 이 생각을 하면 괜히 애틋하고, 또 한 편으로는 조금 슬프기도 하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제이의 '눈부신 날에'다. 어쩌면 이 40일 전체의 플레이리스트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