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방콕에서 버거킹은 처음 와본다. 맨날 지나쳐서 걸어가기만 했었다. 버거킹은 춥다. 태국에서 빵빵한 에어컨은 부와 서비스의 상징이다.
“오빠 먹고 싶은 거 드세요”
와퍼세트가 200바트가 넘는다. 조금 미안하다.
“나 와퍼세트!”
“245바트? 저거면 한국 돈으로 얼마에요? 아직 계산이 안되서”
나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음. 한 8000원 정도 되는 거 같은데”
수지는 좋아한다.
“와 싸네요. 오빠 뭐 좀 더 먹어요”
절대 싸지 않다. 내가 매일 아침마다 먹는 소고기 국수가 30바트다 밥 추가하고 콜라까지 먹어도 55바트다. 밥 네끼를 배터지게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수지가 아직 태국 물가에 적응하기 전이라 뭘 좀 모른다.
오랜만에 기름기 가득한 햄버거랑 프렌치프라이를 먹었다. 담백한 태국 음식만 먹다가 포만감이 훅 올라온다. 입술에 묻는 기름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남아 있는 기분이다.
“오빠 커피도 먹을래요?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먹으러 가요”
그래 이왕 얻어먹을 거 다 얻어먹자. 길거리에서 커피 하나씩을 물고 다시 지니네로 걸어갔다.
“방콕에는 얼마나 있어? 짐이 왜 이렇게 많아?”
하이톤의 수지는 재잘재잘 말이 많다. 외모와 다르다. 방콕에서는 보기 드문 하얀 얼굴에 오똑한 코에 키가 크다.
“지금 UN 방콕지부에서 인턴하고 있어요. 한 6개월은 여기 있을 꺼 같아서 이것저것 챙겨왔어요. 처음 해외에서 살아보는거라 뭘 가져와야 할지 몰라서 가방에 넣다보니 이만큼 됐어요”
방콕에 UN 사무실이 이 근처에 있나보다. 아까 음식 주문할 때보니 그렇게 영어를 잘 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어떤 일을 하는 걸까. 그냥 해맑은 아이다.
“오빠는 여기서 뭐해요? 머리는 이거 오빠 머리에요? 만져봐도 되요?”
나는 그냥 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그냥 숨쉬고 있다. 머리는 내 꺼다. 당연히 만져봐도 된다. 미안한데 머리는 며칠 안 감았다.
“그럼! 만져봐도 되지”
1층 거실에서 딩굴딩굴 거리고 있는데 여행자 몇 명이 들어온다.
“넬리야 이분들 일본분들인데 영어가 거의 안통해. 여기 한인숙소라고 저쪽으로 가면 일본인 숙소있다고 안내 좀 해드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고 ‘아리가토고쟈이마스’ 를 몇 번 듣고 다시 거실에 누웠다.
“오빠 뭐에요? 일본어는 어떻게 할 줄 알아요?”
그냥 어쩌다 할 줄 안다. 궁금한 게 많은 아이다.
다음 날 밤 피곤해서 10시쯤 먼저 자러 3층 내 자리에 누워 안대를 하고 스르륵 잠이 들려는데 1층에서 기선이가 소리친다.
“넬리야 잠깐 내려와봐”
잠결에 잘 못들은 줄 알았다. 다시 소리친다.
“넬리야 빨리!”
나도 소리쳤다.
“왜!”
“여기 외국인 아저씨 왔는데 영어로 얘기 좀 해줘!”
“그 정도는 너가 할 수 있자나! 나 잔다!”
“아니야! 내 영어로 안되니까 부르지! 빨리 내려와봐”
안대를 이마에 스윽 걸치고 눈을 반쯤 감은 채로 터벅터벅 내려갔다. 문을 열고 나가니 4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서양인 아저씨가 있다. 기선이와 수지가 살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하이! 도와드릴까요?”
제대로 된 영어 발음하는 사람이 와서 반갑나보다. 아저씨는 쉬지 않고 말한다.
“지나가다가 여기가 너무 예뻐서 여기 머물려는데 말도 안 통하고 이 사람들이 코리안 숙소라는 말만 자꾸 하는데 여기 하루 얼마야?
말하는데 술냄새가 풍긴다. 영국에서 왔나보다. 진한 영국 액센트다.
“여기 한국인 숙소에요. 지금 주인이 퇴근해서 체크인이 안되요. 내일 다시오세요"
“뭐라고? 한국인 숙소라서 안 된다는 거야? 내가 서양인이라서? 이거 인종차별이야 알아? 그리고 너는 뭐야? 여기 메니져야?”
“아니요 저는 그냥 손님인데 영어를 저만 해서요”
“됐고 나 여기 머물꺼니까 얼마야? 그리고 재수없게 미국 영어 쓰네 너. 영국 액센트가 진짜 영어야 알아?”
졸려 죽겠는데 슬슬 열받는다. 가슴팍에 팔짱을 끼고 노려보며 톤을 바꿨다.
“그래서 뭐? 뭐가 문제야 너? 여기 지금 주인 없다고. 그러니까 내일 오라고! 너가 여기서 이렇게 말해봤자 해결되는 거 하나도 없어. 너 지금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주고 있는거야 알아? 여기 지금 문 닫을 거니까 문 앞에서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던지 말던지 너 알아서 해”
그랬더니 금새 주눅든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여기가 좋아서 하루 묵고 싶다는 거지. 내일 아침에 오면 다시 되는거지? 알았어. 나 간다”
기선이와 수지가 박수를 친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여윽시 넬리!”
“오빠 영어는 왜 해요? 일본어도 하고 영어도 하고 뭐에요?”
궁금한 게 많구나 넌. 나는 피곤해서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