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많은 밤

칼로우

어제 결심한 대로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여기는 시설도 좋고 아주머니도 친절한데 숙박비가 12불이다. 혼자 내기엔 사실 좀 버겁다. 그래서 어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발견한 Golden Lily guesthouse로 가기로 했다. 외관은 좀 후지지만 하루에 7불이다. 화장실이랑 샤워실은 공동이용이다.

아침 10시에 숙소를 옮기고 공동 테라스 같은 곳에 한참 누워서 멍하게 있다가 아까 트레킹 가지 않겠냐고 해서 얼마냐고 그랬더니 14000짯이라 비싸서 안 가기로 했던게 기억났다.

밖으로 나가 혼자 트레킹 하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걸었다. 길따라 올라가다보니 오르막길로 접어들어 산은 아니지만 꽤 경사진 언덕길을 걸었다. 조용한 길을 걸으며 풀 냄새, 꽃냄새를 맡으니 상쾌해졌다. 길가엔 이름 모를 꽃들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는데 색깔이 정말 진했다. 진한 주홍색, 진한 연보라. 진한 파랑, 분홍. 꽃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 시간쯤 걷다 발을 돌려 다시 내려가다 못보던 샛길로 경사진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어떤 미얀마 남자가 어디가냐고 한다. 그냥 걷고 있다고 하니 옆으로 가면 뭐가 있고 위로 가면 뭐가 있고 하며 더듬더듬 영어로 설명해준다. 그러더니 같이 가주겠다고 해서 같이 걸었다.

“미얀마식 간식 아쪼 먹어볼래요?”

먹어보겠다고 하긴 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음식파는 가게는 없다.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작은 집 앞에 인상 좋은 아주머니 두 분이 앉아계셨다. 나무로 엮은 광주리 같은 거에 이것저것 먹을 것이 있다.

아쪼는 모둠야채튀김같은거다. 앉아서 아쪼를 몇 개 집어 먹고 있으니 밑으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온다. 자세히 보니 아기돼지다. 등을 긁어줬더니 더 긁어 달라며 옆으로 아예 누워 애교를 부린다. 개돼지다. 너무 귀엽다.

나랑 같이 길을 걷게 된 그 청년은 나랑 동갑이었다. 짧은 영어지만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 내용을 아주머니에게 통역해 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일어나서 좀 걸어가다 그 친구는 1시부터 일해야 한다며 너무 아쉬워하며 자기 전화번호를 주며 한국에 가면 꼭 전화를 해달라고 한다. 한국에 와서 전화를 하려고 아무리 번호를 찾아도 없다. 미얀마 이 후에 반년 넘게 여행하고 한국에 들어 갔더니 전화번호를 쓴 종이를 잃어버렸나보다. 그 친구에게 정말 미안하다.

다시 열심히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한 네 시간은 걸은 거 같다. 이 정도면 미니 트레킹은 한 것 같아 스스로 만족했다.

숙소에서 한숨자고 나와 밥을 먹고 어제 갔던 피시방 근처에서 쪼그려 앉아 와이파이를 훔쳐썼다. 돈 아끼고 참 좋은 방법같다. 계속 혼자 여행하니 떠오르는 건 가족. 정말 오랜만에 동생에게 연락을 해봤다. 동생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게 많다. 형은 맨날 말만 번지르르하다. 어머니가 불쌍하지도 않냐. 맨날 여행만 하냐. 동생에게 연락해보려고 피시방 옆 하수구 위에 쭈그려 걸터앉아 숨어서 와이파이를 쓰는데 돌아오는 말이 그런 말이니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 되었다.

이렇게 아껴서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뭘 위해 이렇게 행복하지도 않을 여행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호주에서 모은 돈은 충분히 있다. 다음 달에 유럽 가는 것 때문에 이렇게 미친 듯이 아끼고 있는 거다. 유럽을 그냥 가지말고 여기서 행복하게 살까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은 유럽은 안 갔다.) 모르겠다. 혼자 외로워서 드는 생각 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잡생각으로 일기를 쓰고 우울해져서 담배나 피자 하고 밖에 나가니 네덜란드 커플과 호주 여행자 한 명이 있다. 미얀마에 와서 처음 만난 여행자들이다. 정말 오랜만에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미소가 아닌 웃음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다 서로 내일 일찍 일어나야해서 각자 방으로 들어가며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걸.

역시 사람일은 모른다. 기분 좋게 잠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