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기대를 너무 많이 했는지 이 거대한 유적도시에 대한 공부를 안 해와서 그런 건지 생각보다 큰 감흥이 없었던 시안을 떠나 둔황으로 가기로 했다. 짐을 싸서 체크 아웃을 하고 기차역으로 가려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멍하게 비가 오는 밖을 바라보며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삼십 분이 지나도 그칠 기미가 안보여 그냥 가방을 매고 603번 버스를 타고 시안역으로 갔다. 시안은 도시의 규모와 명성에 비해 기차역은 왜 그렇게 작고 지저분한지 모르겠다.
잉이 끊어준 티켓번호로 둔황행 티켓을 끊고 배가 고파서 주위를 둘러보니 별로 먹을 건 없어서 중국 패스트푸드 체인점 ‘DICO’S’라는 곳으로 갔다. 역전이라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고 도무지 줄이 줄지 않아 다시 나와서 서브웨이로 갔다. 중국 서브웨이는 어떤 맛일지 궁금했는데 잘 됐다.
주문을 하고 앉아서 나온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문을 열고 큰 배낭을 맨 아시아 여자가 들어온다. 중국어로 뭔가 주문하는데 발음이 딱 한국인이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세요?”
그렇다고 한다. 중국여행 동안 한번도 못 만났던 한국인 여행자를 드디어 만났다. 거기다 같은 기차로 오늘 둔황으로 간단다. 더 놀라운 건 앞으로의 여행계획이 나랑 똑같다. 신장지역으로 여행 간단다. 너무 반갑다.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기차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두 살 많은 누나의 이름은 수진. 지금 베이징에 있는 한국인 학교에서 지리 선생님을 하고 있단다.
서브웨이를 나와서 플렛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기차 시간이 지나도 게이트가 안 열린다. 연착되었나 싶어 조금 더 기다리는데 갑자기 맨 앞줄에서부터 다들 기차를 안타고 밖으로 하나 둘씩 나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역무원한테 물어보니 중국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 단어 딱 하나를 말한다.
‘Earthquake!’
지진이 어쨌다는 걸까. 중국에서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는 누나가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둔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쓰촨성에서 지진이 났다. 역무원에게 다시 물어보니 간쑤성을 지나는 모든 기차가 캔슬이 됐으니 환불을 받으란다. 환불을 받으러 창구에 가니 사람들이 너무 몰려 당장 환불하는 것은 포기하고 일단 숙소로 같이 돌아가서 다시 체크인을 하고 머리를 맞대고 플랜 B를 생각하기로 했다.
중국 서북쪽 끝에 있는 신장으로 가려면 간쑤성을 통과해야 하는데 기차가 없다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서쪽으로 가지 말고 바로 남부로 내려가서 윈난으로 갈까도 생각해 봤다. 사실 20대 마지막 생일을 윈난성의 리장에서 보내고 싶었다. 누나는 서쪽 끝 신장 여행을 하고 국경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가는 계획이다. 나는 중앙아시아는 관심도 없었다. 누나가 알아본 둔황행 비행기 가격은 기차 가격의 세배, 1175원 (12만원 정도) 이다. 가격이 부담 되어서 고민하는데 여행책자와 사진들을 보여주며 누나의 설득이 시작됐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둔황 가는 기차표를 잉의 신용카드로 끊고 내가 현금으로 줬는데 잉은 내가 둔황가는 기차역에 갔을 때 앨리스와 함께 남부로 떠나버렸다. 표를 환불 받으면 잉의 신용카드로 돈이 들어가고 내가 준 현금은 잉이 그냥 가져 가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숙소로 다시 들어오자 마자 잉에게 메일을 보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누나와 둔황행 비행기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잉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숙소에 두고 온 것이 있어서 찾으러 왔다. 다행히 잉에게 돈을 다시 받았다. 그런데 잉은 긴가민가 하는 눈치다. 환불이 됐을 때 돈이 카드로 다 들어오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혹시나 내가 환불 처리를 안 하면 그 돈은 그냥 날라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잉이 카드회사에 전화해보고 확실히 돈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 나에게 꼭 기차역에서 환불 해달라고 부탁하고 떠났다.
반나절 정도 고민하다 이번에 못 가면 평생 못 가볼 것 같아서 비행기로 둔황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리고 시안에서는 비행기 날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틀 더 있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최고의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시안에서의 이틀은 생각보다 무료하지는 않았다. 한국인 동행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국말도 많이 하고 혼자 걷던 길을 같이 걸으며 서로 사진도 찍어주니 또 새롭다.
누나 가이드북에 있는 도교 사원으로 가봤다. 도교에 대해 전혀 몰라서 큰 감흥은 없었지만 알록달록한 색깔의 깃발들과 소박한 모양의 건물들이 마음에 든다. 다행히 미친 듯이 내리던 비도 그치고 바닥에 물만 조금씩 고여있다. 중국 한복판에 위치한 더운 시안이 그나마 시원해졌다.
내일은 진짜 둔황으로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