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어젯밤도 코골이 빌런은 있었다. 방이 4인실씩 떨어져 있는 구조였는데 내가 있던 4인실에는 코를 골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뚱뚱한 사람들이 주로 코를 곤다. 그리고 피곤한 사람들. 하지만 피곤한 뚱뚱한 사람은 정말 소리가 어마어마하다. 가래침을 만들려고 일부러 내는 듯한 크아아아 하는 소리가 옆 4인실에서 밤새 들려온다. 또 제대로 못 잤다.
5시쯤 돼서 간신히 스르륵 잠 드려는데 규화가 깨운다. 맞다. 오늘은 이동거리가 길어서 6시에 출발하기로 했었다. 얼른 일어나서 가방을 싸서 나왔다. 어제 먹고 남은 백숙 국물에 규화가 닭죽을 해 놨다. 든든하게 먹고 출발했다.
6시가 조금 넘은 스페인은 아직 어둡다. 7시 쯤 해가 뜰 예정이다. 일교차가 꽤 커서 자켓을 입고 걸었다. 아직 깜깜한 밤이라 혹시 앞이 안보일까 싶어 헤드 랜턴도 꺼내서 준비해 놨지만 도시에서 출발하는 거라 가로등이 밝다. 한시간쯤 걸으니 세상이 환해지면서 해가 떠 오른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초반에는 다른 순례자들이 안보였는데 이제 하나둘씩 나타난다. 도로에 차도 하나둘씩 늘어난다. 오늘은 코스는 다양하다. 도로를 따라 한참 걷다가 숲길로 걷고 성당도 있다. 3시간쯤 걸으니 다시 도시가 나온다. 커피가 절실했다. 카페를 발견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켰다. 카미노 첫날 시켰던 그대로 블랙커피와 얼음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황당하게도 카푸치노가 나온다. 물론 얼음 잔도 없다. 그래도 카푸치노 맛이 기가 막힌다. 작은 빵과 츄로스도 나온다. 시킨 것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럽다.
다시 또 걸었다. 날씨가 뜨거워지기 시작하고 하루에 34 키로 걷기는 정말 먼 거리였다. 4시가 좀 안되어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몸도 마음도 지쳤다. 얼른 체크인을 하고 씻고 주방부터 살폈다. 부킹닷컴에는 분명히 키친이 있다고 했다. 막상 가보니 넓고 깨끗한 키친은 있지만 인덕션과 조리도구가 없다. 오늘은 요리 불가다.
장을 봤다. 전자렌지로 돌려서 먹을 수 있는 즉석 요리위주로 샀다. 빠에야와 또르띠아와 토마토맛 참치캔을 샀다. 목이 말라서 안 먹어본 맥주 두 캔과 와인도 사서 숙소로 왔다.
허기져서 얼른 전자렌지로 음식들을 돌리고 맥주와 와인과 함께 허겁지겁 먹었다.
이제 곧 영국으로 가야 하는데 ETA 비자 신청을 안 해서 얼른 하기로 했다. 모레면 카미노 길도 끝이라서 그 다음은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했었다. 스페인에 온 김에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도 가봐야 하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야하나 생각하며 교통편을 알아봤다. 스페인은 생각보다 큰 나라라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는 꽤 멀고 교통편도 비싸다. 그러다 스카이스캐너에서 어디든지로 설정해 놓고 가장 싼 곳을 찾았는데 모레 걷기가 끝나고 그 다음날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가 한국돈으로 5만원 좀 넘는다.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로 가는 버스보다 훨씬 싸고 시간도 덜 걸린다. 터키에서 만난 앨리스가 추천해준 스코틀랜드 트레일도 가면 되겠다 싶어 결제해버렸다. ETA 비자는 신청만 하면 하루안에 혹은 몇 분 안에 나온다고 해서 미루고 미루다가 신청했다. 문제는 결제하는데 은행 인증을 해야한단다. 지금까지는 항상 한국에서 토스나 네이버로 인증했는데 해외인데 문자나 ARS 인증을 하라고 뜬다.
한국심칩은 있지만 장기 해외여행이라 일시정지를 시키고 왔다. 아무리 해도 인증이 안된다. 한 두시간정도 씨름을 해도 절대 안된다. 스트레스다. 주방에서는 와이파이가 잘 안 터지기도 하고 바람도 쐴 겸 밖에 앉아서 계속 시도하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건다. 아까 잠깐 인사했던 스페인 커플이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흥미를 보이더니 계속 말을 건다. 비자 신청이 계속 안돼서 열 받아서 내일하자하고 그냥 포기하고 이야기하며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