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하이랜드 웨이 첫쨋날
밤새 오들오들 떨었다. 너무 춥다. 경량 패딩에 쉘 자켓을 입고 손이 시려 처음으로 장갑도 끼고 침낭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잤지만 춥다. 폰으로 온도를 보니 6도다.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 겪는 온도다. 앞으로 매일 이런 온도와 밋지와 싸울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선다.
캠핑장이라 일찍 철수할 필요도 없어 8시쯤 밖으로 나가 캠핑장에서 주는 조식을 먹었다. 빵 두개에 버터를 발라 먹고 바나나와 커피 한잔했다. 다시 텐트로 가서 짐을 싸고 나와서 8시 40분쯤 출발했다. 오늘부터 진짜 시작이다. 첫날이지만 버스로 꽤나 거리를 줄여 놓아서 마음 편하게 최대한 갈수 있는 곳까지 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날씨가 맑다. 하늘이 새파랗다. 스코틀랜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길 옆에 피어 있는 꽃들과 나무도 다르고 간간히 보이는 건물 모양도 다르다. 게임이나 영화에서 보던 맵을 걷는 느낌이다. 샛초록색 초원이 많고 언덕과 구릉이 많다.
그래도 4일 쉬어서 그런지 발걸음이 가볍다. 까미노를 걷는 내내 아팠던 왼쪽 어깨 통증이 없다. 신나게 걷는데 조금전까지만하도 새파랬던 하늘이 잿빛 구름으로 바뀌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금방 그치겠지 하고 참고 걸으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다 젖는다는 것을 카파도키아에서 배웠다. 한두방울 떨어지는 순간 바로 우비를 입어야 한다. 스페인에서 규화와 헤어지던 날 우비를 안 받으려다 받아 오길 잘했다. 레인자켓이 있어서 안 받으려고 했지만 가방까지 커버되는 우비 덕분에 든든하다. 빠르게 가방을 내리고 레인코트를 몸과 가방까지 씌웠다. 입는다는 표현보다는 몸에 씌운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한 30분정도 지나니 다시 하늘이 맑아지고 비가 그친다. 다시 우비를 벗어 가방에 넣고 걸었다.
그렇게 또 한번 비가 새차게 내렸다가 그 후로는 계속 파란 하늘이 이어진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는 지금까지 걸었던 어떤 트레일보다도 길이 잘 되어있다. 이정표가 잘되어 있다고 하기 보다 길이 대부분 하나로 주욱 이어져 있어 길만 따라 걸으면 된다. 4시간쯤 걸으니 오늘의 하이라이트 코닉 힐 (Conic Hill)이 나온다. 오랜만에 스틱을 꺼냈다. 300미터가 좀 넘는 언덕 같은 산이지만 아직 걸을 여정이 많이 남아있어 최대한 체력을 아끼기로 했다.
동그랗고 샛초록색과 어두운 갈색이 어우러진 큰 능선이 나온다. 이것도 영화에서 본 듯한 곳이다. 30분 정도의 잠깐의 오르막길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정상에 올라가니 탁 트인 뷰에 호수와 산이 같이 보인다. 한참 앉아서 쉬다 다시 걸었다. 이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아까 오르막길을 오를 때 마주쳤던 서양인이 10분만 가면 정상이라고 했었는데 10분이 아니었고 20분만 가면 맥주 파는 곳이 나올 거라고 했었지만 한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슈퍼가 보이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바로 들어가서 맥주 두 캔과 환타 하나를 샀다. 맥주 한 캔은 의자에 앉아 바로 까서 들이켰다. 꿀맛이다. 목마름이 해소되었으니 또 걸었다. 이제 배고픔을 해소해야 할 때다. 벌써 시간은 2시가 넘었다. 걸은지 6시간 째다. 맥주와 환타를 가방에 넣고 걸으니 짐이 훨씬 무거워진 것 같다. 둘쨋날 끝나는 포인트인 로와데넌 (Rowardennan) 까지는 못 갈 것 같다. 슬슬 지친다. 걷다가 제일 먼저 나오는 캠핑장으로 갔다. 밀라로히 베이 (Milarrochy Bay) 캠핑장이다. 반갑다. 4시 반쯤 되었다.
얼른 텐트를 치고 씻었다. 배고파서 런던에서 사온 육계장 컵라면과 치킨커리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뜨거운 물이 없다. 키친에는 가스를 사용해서 불을 못 피우게 되어있다. 리셉션에 가서 도와달라고 했더니 웃으며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준다. 물을 담아서 키친으로 돌아와 맛있게 맥주와 먹었다.
키친에 충전하는 곳이 있어 보조배터리를 꽂았는데 네 시간 동안 10퍼센트 밖에 안찬다. 오늘 밤새 꽂아 놓으면 그래도 반은 차겠지.
내일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소식이다. 꽤나 폭우가 쏟아질 예정이다. 긴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