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멈추지 않고 벌레들은 달라들고

웨스트하이랜드 웨이 셋쨋날

by nelly park


어제 너무 힘들어서 아주 푹 잤다. 오늘은 20키로만 걷기로 했다. 3일 연속 30키로대를 걷기는 아무래도 무리 일 것 같다. 빨리 간다고 해서 큰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얼른 끝내서 밋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만큼 밋지는 괴롭다. 일단 식당으로 가서 커피 한잔했다. 다른 아침메뉴도 먹을까 했지만 오늘은 거리가 길지 않아서 돈을 아끼기로 했다. 체질이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아침에 밥을 안 먹으면 못 걸었었는데 이제 걸을만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것 같다. 커피를 다 마시고 얼른 리셉션으로 가서 밋지넷을 샀다. 이 고무줄만 달린 양파망 같은 것이 9.5파운드라니. 2만원이다. 이 말도 안 되는 물가도 얼른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이유 중에 하나다.



밋지넷을 쓰고 비를 맞으며 텐트를 정리했다. 오늘도 텐트는 젖은 채로 간다. 그래도 오늘은 하루종일 비 예보가 아니라서 우비는 가방에만 둘러 씌우고 쫙 짜 맸다.


오늘도 우중 트레킹 시작이다. 양말은 새 것으로 갈아 신었지만 신발은 아직 젖어 있다. 당연히 몇 걸음 안가서 양말도 다 젖었다. 바지도 다 젖었다. 어제보다 비가 더 많이 오는 것 같다. 진흙탕길도 더 많아진 것 같고 물이 고인곳도 더 많다. 어차피 다 젖었는데 요리조리 피하지 말고 그냥 물위로 걸었다. 시원하고 좋다. 걸음도 훨씬 빨라지고 스트레스도 없다. 물웅덩이를 피하려고 걸어 어차피 진흙탕에 신발이 빠진다. 똑같다.



오늘은 양들이 많이 보인다. 한국양들과 다르게 생겼다. 얼굴과 다리만 까맣고 머리에는 둥그렇게 말린 뿔이 달렸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심하다. 조금만 가까이 가도 호다닥 도망가버린다. 오늘도 안개가 뿌옇게 껴서 분명히 예뻤을 뷰가 잘 안 보이고 신비한 모습의 숲 속을 걸었다. 그래도 발걸음이 가볍다. 조금만 걸어도 10키로대가 남았다고 뜬다. 어제는 아무리 걸어도 10키로대가 안 나와서 심적으로 더 힘들었었다.


다만 어제와 다른 점은 중간에 바가 하나도 없다. 아침부터 커피 말고는 입으로 들어간 것이 없다. 이상하게 물을 안 마셔도 목이 안 마르고 걸어도 배가 안 고프다. 이제 여기를 걷는 것에 완벽히 적응했나 보다. 오늘도 산길을 걸어서 오르락내리락 했지만 길이 훨씬 넓어서 걷기 좋다. 챗gpt는 로흐 로먼드 (Loch Lomond) 호수를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코스라고 했지만 비가 심하게 내려 뿌옇고 바람이 새차게 불어 호수가 파도치는 것 밖에 안보인다. 오늘도 상상할 수 밖에 없다. 저 파아란 호수 위로 햇살이 비추면 반짝반짝 빛나겠지. 적어도 오늘은 그럴 일이 없다. 네시간쯤 걸으니 이제 호수도 끝나고 본격적인 고원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드디어 해가 조금 보인다. 그러다 이내 다시 구름으로 하늘이 덮이고 비가 내렸다가 또 갰다가를 반복한다.


다섯시간만에 캠프사이트에 도착했다. 1시가 조금 넘었다. 2시부터 체크인이라고 해서 기다렸다. 밋지넷을 써봤다. 쾌적하다. 앞이 조금 흐리게 보이는 것 빼고는 좋다. 진작 샀어야했다.



2시가 되어 체크인을 했다. 주인아저씨가 텐트 치는 것은 좋은데 며칠 전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텐트에 물이 차서 난리가 났었다고 하신다. 이걸 감안하고 치란다. 나무 오두막 캐빈은 69파운드란다. 절대 그 돈 내고 잘 수는 없다. 무슨일 있겠어? 일단 치자. 여기 사이트에 리뷰를 보니 드라잉룸이 잘 되어 있다고 했다. 아까 걷다가 만난 영국인 아저씨도 작년에 여기서 잤었는데 비가 다 젖은 신발이 다음날 아침에 깨끗하게 말랐다고 한다. 그동안 젖은 양말과 신발을 드라잉룸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의 젖은 신발과 양말 때문에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내 것도 별반 다름없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다시 젖겠지만 적어도 출발하는 아침에라도 쾌적하게 출발하면 좋겠다.



배고파서 즉석식품 두개를 먹었다. 키친에 커피포트가 있다. 가스로 물을 끓일 필요가 없다. 점점 이소가스를 괜히 샀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번도 못쓰고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수 있겠다. (이소가스를 가지고 비행기 타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터키에서도 큰 이소가스를 사고 두 세번밖에 안 쓰고 터키에 버리고 왔었다. 맛있게 밥을 먹고 씻고 나니 또 비가 와서 텐트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한숨 잤다. 무리안하고 빨리 사이트에 도착하니 좋다.



오늘 이후부터는 식량 보급을 할 곳이 거의 없다는 정보에 이것저것 사러 슈퍼에 갔다. 에너지바 세개랑 맥주 두개랑 환타를 샀다. 내일은 또 30키로를 걸어볼 생각이라 중간에 먹을 간식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너무 힘들었다. 오늘처럼 중간에 바가 없었으면 아마 못 걸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사이트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는데 밋지 때문에 마실 수가 없다. 얼굴을 다 덮는 밋지넷을 쓰고 마실 수도 없다. 얼른 텐트안으로 들어와서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 많이 걸으려면 푹 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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