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피스 호수
푹 자고 일어났다. 사실 새소리 때문에 깼다. 한가지 새소리가 아니다. 여러가지 새소리가 모여 듣기는 좋았지만 시끄러워서 깼다. 7시 좀 넘어서 일어나서 기분 좋게 새소리를 들으며 누워있었다. 이런 알람 소리를 만들면 매일 기분 좋게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텐트를 여니 밖은 이미 해가 쨍쨍 떴다. 개운하게 샤워를 했다. 오늘은 최대한 캠핑장에서 버티다 나가야 한다. 오늘 잘 곳인 소라피스 호수는 여기서 4시간 반정도면 간다. 돌로미티는 캠핑이 불법이라 해가 지고 비박 형태의 캠핑은 암묵적으로 허용된다고 하니 늦게 가야 해가 질때까지 최대한 적게 기다릴 수 있다.
어제 사왔던 샌드위치를 먹고 텐트에 들어가서 짐 정리를 해놓고 가방을 배고 누웠다. 시끄러운 새소리를 자장가 삼아 또 한숨 잤다. 11시 반쯤 되어서 체크아웃을 하고 나왔다. 일단 마을로 가서 피자를 먹으며 시간을 좀 때우기로 했다. 어제는 캠핑장까지 내려가느라 못 느꼈는데 생각보다 꽤 오르막길이다. 피자집까지 걸어 올라가는데 숨이 턱턱 막히고 정오의 코르티나는 해가 강렬하다. 피자집을 여러가지 검색해봤는데 다 12시 오픈이다. 식당형태가 아닌 테이크 아웃형태의 피자집으로 가봤다. 햄과 파프리카가 올라간 피자 한판과 맥주를 사서 가게 앞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오늘 그래도 오랜만에 좀 걸어야 하는데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 이탈리아 피자는 뭔가 다르다. 그냥 다 맛있다.
소라피스 호수로 가는 들머리 파소 트레 크로치(Passo tre croci)까지는 걸어서는 두시간이고 버스로는 20분이다. 그런데 버스가 4시에 있다. 아직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고민되었다. 그냥 걸어갈까 하다가 두시간 동안 고도가 800미터 높아지는 찻길을 걸어가야 한다. 위험하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트레킹하기 전에 힘을 빼기 싫다. 푹 쉬면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며 기다리는 게 현명한 것 같다. 어제 같던 마트에 가서 샌드위치 두개를 더 샀다. 하나는 오늘 저녁으로 하나는 내일 아침으로 먹을 것이다. 그냥 마냥 기다리기에는 시간도 안 가고 햇빛이 너무 강해서 햇빛을 차단해주는 파라솔이 있는 레스토랑에 앉았다. 커피 하나를 시켜서 앉아 있었다. 커피를 다 마셔도 시간이 안 가서 스프릿즈를 시켰다. 확실히 관광지라 물가가 훨씬 비싸다. 10유로다. 어쩔 수 없다. 비싼 거 마시는 만큼 시간이 잘 가겠지.
3시 40분쯤 나와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딱 시간 맞춰서 51번 버스가 온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올라가는데 버스 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끝없는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걸어갔으면 들머리에서 이미 퍼졌을 것이다. 파소 트레 크로치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시간이 늦은 만큼 많은 하이커들이 이미 트레킹을 끝내고 내려오고 있다.
조금 걷다 보니 오르막 길이 나온다. 그리고 또 계속 오르막 길이 나온다. 오랜만에 산을 타서 그런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그동안 트레일은 평지에 오르막길 조금 정도였다면 여기는 그냥 산을 계속 탄다. 중간중간에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져서 그걸 보면서 잠깐 가방을 내리고 멈춰서 쉬고 다시 걷고 했다. 내일도 이런 오르막길을 걸으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사람 한 명 딱 지나갈 길 바로 옆으로는 낭떠러지 길도 있다.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들은 오지도 못할 것 같다. 2시간반정도 걸려서 도착했다. 사방이 막힌 숲을 지나 앞으로 새파란 에메랄드 빛 호수가 반겨준다. 피로가 싹 씻긴다. 그 옆으로는 흰색의 거대한 기둥 같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호수 입구 저 맞은편으로 평평한 곳이 보인다. 저기가 내가 오늘 잘 곳이구나. 호수를 빙 둘러서 맞은편으로 갔다. 생각해보니 호수물을 정수해서 사용하려고 물을 많이 안 가져와서 거의 다 떨어졌다. 옆에 있던 칠레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저 물 정수해서 마셔도 안전하겠지? 하고 물으니 안 될 거 같다고 한다. 어쩌지 나 여기서 자야하는데 물이 없는데. 그러자 친구들은 자기들은 이제 곧 내려간다며 남은 물을 조금씩 내 물병에 채워준다. 정말 인류애는 살아있다.
고맙다고 작별인사를 하고 가방을 내리고 앉아서 호수를 멍하게 보면서 해가 지길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백패커들도 여기 자려고 하나둘씩 온다. 지금까지 만난 이탈리아 친구들이 하나같이 똑같이 말했었다. 돌로미티에 캠핑하는거 불법인데 진짜 다해. 우리도 했어. 그냥 하면 돼. 그 말이 이 말이구나.
해는 9시쯤 진다. 2시간쯤 기다리니 흰색 산이 해를 받아 황금빛으로 변해가고 호수색깔도 어두운 파랑색으로 변했다. 이제는 텐트를 쳐도 되겠다 싶어서 피칭을 하고 텐트안으로 들어왔다. 내일 아침이 기대된다. 텐트밖 풍경을 보고 내가 이런 곳에 자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