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많이 걸었다

미수리나

by nelly park


5시쯤 넘어서 깼다. 어둠이 내린 소라피스 호수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덕분에 푹 잤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빨리 철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찍 눈이 떠진 것 같다. 텐트 밖은 약간의 물안개가 호수를 뒤덮고 있고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아직은 어두스름하다. 좀 더 텐트안에서 호수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얼른 짐을 정리했다. 6시가 다 되어가니 벌써 맞은편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호수를 구경하러 왔다. 호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아 텐트는 완전히 젖었지만 말리고 갈순 없다. 젖은 텐트 그대로 텐트쌕에 넣고 우비로 돌돌 말아서 가방안으로 넣고 완전히 정리했다. 간밤에 왔던 다른 팀들도 슬슬 정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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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뜨고 다시 호수는 새파랗게 변하고 그 옆으로 서있는 높은 돌산들은 하얗게 빛난다. 가방을 메고 하산을 시작했다. 어제와는 다른 코스로 내려갔다. 오늘의 목적지는 아우론조 리푸지오(Auronzo rifugio)다. 17키로 정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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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내려왔다. 어제 꽤나 높이 올라왔나 보다.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어제 칠레 천사들에게 받았던 물이 거의 떨어져 갈 때 쯤 샘물이 나온다. 정수필터로 정수해서 다시 물을 1리터쯤 채웠다. 아침부터 해가 뜨겁다. 물을 계속 마시며 2시간 정도 내려오니 평지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오르막길이다. 분명히 아침에 어제 사왔던 샌드위치를 먹고 초콜릿바까지 먹었는데도 허기지다. 목도 마르고 지친다. 해는 뜨겁고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지쳐서 자주 쉬었다. 다시 2시간쯤 지나니 마을이 나온다. 미수리나(Misurina)다. 마을 초입에 멋진 호수가 반겨준다. 그리고 배가 고픈 나에게 식당들이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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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집으로 가서 피자와 맥주를 시켜서 앉았다. 이 마을에는 캠핑장이 있다. 고민되었다. 앞으로 4키로 정도 더 가면 목적지가 있지만 12시밖에 안 되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대충 2시에서 3시 사이. 거기서 또 해가 질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안될 거 같다. 오늘은 쉬어야겠다. 캠핑장으로 걸어가서 체크인을 하고 텐트를 쳤다. 15유로다. 확실히 시내보다는 싸다. 그늘이 없어서 너무 뜨거웠지만 텐트 문을 다 열고 한숨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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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해서 널어놓고 다시 마을로 가서 마트에서 맥주 두 캔을 사서 한 캔을 마트 근처 그늘에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며 한잔했다. 다른 한 캔은 다시 텐트로 돌아와서 한잔했다. 5시쯤 넘으니 쌀쌀 해진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또 누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게 몸이 안 좋다. 여행 두달반만에 처음으로 컨디션이 안 좋다. 진통제를 하나 먹고 입맛은 없지만 캠핑장 식당에서 파스타를 하나 먹었다. 맛도 없고 양도 적었지만 12유로다. 하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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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수록 잘 먹어야 한다. 여행하면서 잘 못 먹고 계속 걸어서 피로가 누적되나 보다. TMB도 가야하고 쿵스레덴도 가야하는데 이제 그만 걷고 싶다. 그냥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싶다. 여기까지 와서 안가는 것도 아쉽지만 별로 걷고 싶지도 않은데 억지로 걷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로마까지 가는 티켓과 숙소와 파리로 가는 티켓과 숙소까지는 결제했다. 파리에서 한국가는 티켓을 알아보고 결제까지 할뻔했다가 혹시나 몰라서 아직은 안 끊었다. 내일 컨디션보고 또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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