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_개신교 성경 <욥기> 8장 7절
세 친구, '욥'을 방문. 그에게 닥친 당장의 곤란이 까닭 없음을 모르는 친구들. 보고 있자니 딱하여 저마다 거든다고 보탠 조언이 곧 네 죄를 주께 고하고 평안 얻으란 내용 일색. 인용부는 개중 친구 '빌닷'이 이른 말 가운데 한 구절. 오해 방지 위해 부연하면, 방문한 세 친구 모두 나름 의리맨. 2장 12,13절 보면 괴로운 지경에 처한 친구 모습이 너무 처참하여 '울면서 겉옷을 찢고, 재를 날려 머리에 뒤집어쓰'는 등의 행위도 보임. 그러니까 '어떻게 네게 이런 일이 닥친 거니?'라며 저희들도 괴로워 몸서리친 것. 이후 7일 간 '욥'의 곁을 침묵으로 지키다 '잘 생각해봐, 그래도 네가 뭘 잘못했겠지'라고 한 것. 하여도 가만히 곁을 지켜주는 편이 나았을 텐데. 속 모르는 친구들이 이른 말들에 마치 맨살에 소금 닿은 지렁이처럼 괴로워 꿈틀대는 '욥'. 정의를 믿어 의심치 않던 차에 맞닥뜨린 환란. 이를 두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탓하니 공의롭지 못한 세상을 홀로 마주하고 감당하려니 심경 얼마나 괴로웠을지. 감정 이입하는 내가 다 이리 괴로울 정도이니 ~~;
그런데 이게 와전이랄지 아니 왜곡이랄지 점점 후자의 편에 무게가 실리는 듯싶은 세태라니. 전후 사정 건너뛰고 표현만 덕담처럼 회자되니 기묘하다면 기묘한 형국. 금권 장악 경제 생태, 플렉스라면 규모로의 접근이어야 마땅하다는 전제를 깔고서 너나 할 것 없이 동일 잣대로 가늠, 시작을 '미약'하다 이르며 역시 그 기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야로 '창대'하라 축복이니 본말전도本末顚倒도 이만저만 아닌 것.
딱히 '욥'처럼 사는 것도 아니요, 이후로도 그리 살 생각 전혀 없는 사람들끼리 어울려서는 '미약'을 딛고 이루겠다는 장래의 '창대'를 입에 올리는 광경은 정말이지 기이하다. 이런 현장, 곧 '창대'를 덕담인 양 주고받는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서로 간 '욥'처럼 살 생각이 없음을 자인自認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 바른 삶과 동떨어진 삶을 부끄러워하긴커녕 반대인 형편을 천명함과 다르지 않으니 뻔뻔한 게 아닌지.
헐벗은 것도 아니건만 입성은 잘 차려야겠고, 더하여 얼굴부터 몸까지 외형도 가꿔야겠고(해서 네추럴-본natural-born인 에이징aging에도 안티anti-로 열과 성을 다하고 말이지) 등등의 처사 모두 결국 자기 자신 어떻게 보일 지를 염두에 두고 사는 것. 자신을 가늠하는 타자의 기준과 잣대, 재단하는 바깥 시선에 아양 떠는 형편. 이에서 거리 두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한 채 진보적 스텐스까지 취하려니 꼬이는 스텝이겠고.
깔끔과 청결 이상의 소비. 과시욕, 뽐내려는 허영에 봉사할 뿐인 액세서리로 기능하니 모든 게 겉돌밖에. 적어도 high-educated라면 현재 low-income이거나 말거나 불로소득 바탕으로 꼴값인 졸부의 아비투스habitus 흉내에 열을 올리진 않을 터. 그런데 실상은 대체로 부화뇌동인 격. 그러니 겉돈다. 양극화임에도 이 현상, 극복은커녕 외려 고착/심화되는 데에는 미러링으로 재생산 거듭하는 욕망 때문. 이로써 오블리주oblige 실종, 무늬만 노블레스noblesse가 득세.
양손에 떡을 움켜쥐려는 욕망에 조아리는 충직한 신하 된 꼴이 스스로도 부끄러워 감추려 드는 모양새는 그래도 양반. 이조차 실종 지경이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소위 배운 자들의 뻔뻔함이 정말이지 극에 달한 듯싶은 요즘.
실천으로 옮아가지 못하는 '기억'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지. 입에 붙는 말이야말로 제스처/포즈에 불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니 『전태일 평전』이니(이조차 부채의식 불러일으키는 레거시의 총체인 양 이젠 거론조차 거추장스러운 형편 되는 듯싶을 정도로 무람없는 세태) 읽었다고 아는 것처럼 이르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그런 사람 드문 이유일 듯싶다. 내내 겉돈다. 정말이지 내내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의 작중 화자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렇게 안녕, 해도 괜찮은 걸까. 네? 여러분, 우리 이렇게 이런 식으로 각자 안녕한 게 바람직한 겁니까!? 이래도 되나 싶은 나로서는 정말이지 모르겠네요 ~~;;
배움 그러니까 깨달음이란, 지상에 붙들린 동물계의 형편을 깨고 의義에 닿고자 하는 노정路程 전체를 일컫는 것일 텐데. 견물생심見物生心이게 마련인 육신의 욕망을 제어, 그에서 돌이켜 기어코 견리사의見利思義 쪽으로 나아가도록 함이 앎[知]. 이를 바탕으로 비로소 힘[力]을 다루게 되는 것. 그런데 이 힘[力]을 제게 유리한 편으로만 다루니 그야말로 아전인수我田引水로 곡학아세曲學阿世인 형편. 이 모양이니 식자우환識字憂患 시즌 ~ing 아니 될 수 있나, 오호애재嗚呼哀哉라.
그렇다면 배움에 소요되는 시간은 어디서 비롯하였을까? 살피면, 분업화의 극을 이룬 이 사회에 투영하면 훤히 드러나니 저가 배움에 임할 수 있던 자체부터 당초 누군가, 배우는 이 역시 동물로서의 동력 유지에 필수불가결인 재화 등을 생산하는 데 종사하는 식으로 자기 삶의 귀한 시간을 노동에 할애하였기 때문. 그러니까 소위 배운 자들이 누린 시간의 실체야말로 언급한 바처럼 누군가 종사함으로 해서, 그네들이 노동 종사하며 감당한 그 부자유만큼 상대적으로 자유를 구가할 수 있던 것. 가장 가까운 예로 혈연 서사 중심 이루는 가계의 가부장家父長 내지 가모장家母長의 희생이겠다. 그러나 그러하다 해서 혈연에 묶이는 것이야말로 함정. 배움은 혈연 울타리 안으로 고이지 않도록 그 정저지와의 울타리를 걷어 치우기 때문에. 그런데 이렇게 배움으로 누린 시간, 자유의 실체를 전혀 어림하지 못하는 지적 수준이라니. 대체 무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인지부터 의심해야 하잖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하여 투자(?)만큼 뽑겠다 덤벼들어 이전투구泥田鬪狗 아수라 장을 열어젖히니, 이를 두고 어찌 뻔뻔함이 극에 달하지 않았다 할 수 있으랴. 이건 정말 아닌 거죠 ~~;;
'미약'한 시작? 아니! 끝까지 '미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義보다 금권에 '눈먼 자들의 도시'에선 '카이사르Caesar'가 호가호위狐假虎威 하게 마련이니. 당초 니즈needs가 다른 걸 어쩌랴. 그러니 배운 사람이면 배운 사람답게 마땅히 이 세속에 팽배한 니즈의 '다름을 인정'해야지. 그걸 같이 쫓으면 뭐 어쩌자는 거임??
이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이야말로 의義에 구속되는 형편 임을 자인하는 것. 견물생심.etc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기본 욕구를 극복이랄까 ~ 정복이랄까 ~ 아무튼 하는 것. 이렇게 표현하니 무어나 대단한 금욕을 요하는 것처럼 보이고 들릴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고! 그저 필요 이상 구求치 않는 것뿐.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노란 말씀은 그래서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리라.
필요 이상을 구하지 않는 것,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양극화처럼 왜곡 일색으로 일로매진인 시장의 자원 배분 기능의 근본적인 결함과 이에 개입이야말로 불가피인 근거를 계속해서 밝히는 것. 바로 이러한 데에 열과 성을 다할 때, 자기 필요 또한 구하자고 애를 쓰지 않아도 충족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게 믿음의 실체로 신념 아닐지. 하니 이들에게 걸리는 바가 무엇이겠나? 없어요! 없다고!! 그러니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게 되는 것.
때문에 배운 자는, 당장의 불가능이자 꿈처럼 여겨지는 일을 가슴에 품는 리얼리스트 ¹로 화化할 밖에 도리 없는 것. 이런 형편에 서지 못하는 배움이라니 어/불성설. 하지만 허명虛名을 전하기도 하는, 아니 대개 허명 전하기 일쑤인 세상이니 어불語不임에도 마치 성설成說인 양 들어서는 현장? 끊임없이 목도하게 될 것. 그렇다고 그를 기웃대는 것도 모자라 탐하고 쫓을까?! 네버!!
위정자, 종교지도자 등에 국한된 얘기 아닌 것. 외려 소위 리더를 자칭自稱하는 치들일수록 참칭僭稱 혐의 벗으려거든 개신교 성경 <레위기> 정돈 읽어봐야 하잖나 싶다. 당초 저희들의 노동 열외 조건 자체가 워십worship 비롯한 정치/법률 등 서비스 제공 위한 종사. 때문에 그로써 취하는 몫은 딱 필요한 만큼을 노동 종사인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채워주는 것. 이게 소위 '십일조十一條'의 유래 아닙니까, 개신교 목사님들? 그런데 이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으로 '창대'해진 교회를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현실. 이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먹사'라는 멸칭이지 싶고. 그런데 이처럼 거꾸로 뒤집어, 주객전도 형국 만들어 놓은 것도 모자라 계속해서 이를 당연시하니 '화 있을진저, 독사의 새끼들아'²라는 말씀이 두렵지 않은 모양.
저희도 지키지 못하는, 아니 지킬 생각 없는 걸 밖으로는 지키라 떠든들 누가 그 말에 따를까. 자신들은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서, 뱉는 말[言]에 올라타 그 말[言]이 가리키는 바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멀리 벗어나고자 달음질 연속인 이들. 그 오십 보 백 보 정도가 제로에 근접, 수렴하기까지 서열화 이루니 21세기 新계급. 이도 저도 못 하고 못 되는 사람들이 바닥에 자리하여 이를 떠받치는 구조. 이 기형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야말로 협잡에 동참이니 모두 유죄.
다시 이르자면, 위정자나 교계 등의 소위 지도층 인사에만 국한된 이야긴 아닐 것. 동네에 자리한 서점주까지 문화 생산 거점을 주장하는 모든 목소리의 주체들 또한 예외 아닌 것('20년 진행 사업 관련, 마련된 단톡방에 다른 서점주처럼 나도 들어 있다. 희한한 건 소규모/소소함을 강조하는 내용의 기획임을 안팎으로 강조하다가도 이를 기안起案 집행하는 서점주 몫으로 예산 편성되어야 함을 주장할 때만큼은 무어나 대단한 기획으로 탈바꿈되는 느낌. 그런데 내가 느끼기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배움에도 그리고 당장 서점주로 점포 안에서 누리는 시간부터 모두 자유로운 형편으로 그야말로 구가하는 입장이란 것. 하여도 서점 찾는 이 적은 만큼 이를 조력한다고 편성된 예산이고 사업인데.. 늘 당연하다는 입장이 아예 디폴트 값이고 더하여 몫을 주장하기 바쁘다. 이게 참 희한하다. 그렇게 억울하고 힘든 걸 왜 하지?! 굳이??). 외려 사표師表 부재不在라면, 공자가 남긴 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³ 되는 관계 조형이 마땅. 21세기 K-민초 가운데 기본 교육 이수하지 않은 이, 특별한 사정 아니고서야 드물 것. 무릇 배움에 임한 모든 민초라면 제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거리두기야말로 의무다, 의무!! 오블리주 감당하는 주인으로서 민초. 이를 기틀로 비로소 민주民主 되는 게 아닐지.
시작부터 끝까지 '창대'와는 연 맺지 못하고 '미약'에 머물 수 있다. 아니 그럼 또 어떠랴! 그럴 수도 있지, 가능성 열어두고 이런 운명을 끌어안는 것이야말로 진정 아모르-파티. 끝끝내 미약할지라도 의義를 가리키는 나침 따라 가꾸기를 지속하는 것. 이런 강단이야말로 담대의 결정체일 것. 이러지 못하면 겉돌 뿐인 건데, 빚어진 말글 입으로 제아무리 주워섬긴들 죄다 패션. 이래서야 '곧은 소리를 부르'⁴는게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곧은 소리는 소리'임을 알고 귀 기울이는 배움. 그를 쫓으니 절로 '나타와 안정을 뒤집'게 되고, '높이'에도 '폭'에도 마음 앗기는 바 없이 '떨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낮은 데로 말이지.
¹ 체 게바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품고'
² 개신교 성경 <마태복음서> 23장, 전면에 걸친 게 이러한 경고
³ 『논어論語』
⁴ 김수영,詩 「폭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