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 안에 諍 있고 諍 안에 和 있다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정말이지 지支/리離/멸滅/렬裂 지경으로 자아-분해 겪게 마련인 근로(매 순간 채 썰리듯 슬라이스 된 자아像 소진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아니면 견디고 버티다 결국 분열, 기어코 불가해不可解 영역으로 망명까지. 무산자無産者의 불우不遇─정말이지 기회를 얻지 못한, 때를 마주하지 못하였을 뿐이지만─는 태초부터 예견된 운명이랄까). 여기서 비롯하는 약간의 희喜, 대개의 노怒와 애哀 그리고 실감으로 거머쥐지 못하는 신기루처럼 어렴풋한 상으로 부유할 뿐인 락樂─때문에 태반은 액정 너머 소수의 현실을 유사 체험으로 족하다 여기는─경험으로 구축되느니 일상.


그런데 정작 다수가 처한 이 현실과 거리를 두겠다고 애를 쓰는 형편에서 깜냥에 되지도 않게 사람을 품品으로, 위位와 격格을 가늠한다고 구별 지으며 우아를 자처하니 기氣도 안 찰 노릇('좋아요' 따봉 추수에 열 올리는 SNS 유행문은 대개 이런 데에 편승. 추상한 개념어를 대립 구도로 두고 '단정/바름/정갈' 등 따위의 수사를 덧붙이며 이를 '좋아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갈음. 하지만 이는 이분법 단순 도식을 내면화, 편향에 봉사하며 갈등만 부추길 뿐. 따위의 언사를 늘어놓는 중에 '이성'이니 '판단'이니 표했다 해서 그 내용 '이성적 판단'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리 된 양 의기양양이니~~;; 이는 아마, 따위를 생산(쨌든 이 역시 생산이라는 범주에 넣어준다면)하는 축도, 그를 소비하는 축도 좋아요와 퍼 나르는 수치가 승인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지 싶다. 하지만 실상 현실 도피로써의 정신 승리로, 망상계에 머물려는 유아적 퇴행에 불과하잖나. 이를 참인 것처럼 여길수록 현실과의 괴리는 더욱 심화될 뿐.


그런데 이를 경계, 성찰 촉구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런 '네가 옳다'는 식으로, 더하여 그런 네게 상처만(?) 주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말라'는 식의, 실제론 앞서 언급한 망상계 망명을 부추길 뿐인 서사를 생산, 이를 팔아 실리 취하는 축들. 그러니까 자신들은 정작 그 실리를 바탕으로 쌓아 올린 축대 위에서 이 현실, 부박하다 가늠하며 관전하는. 이를 열망하는 속내를 감추느라 말을 꾸미고 낯빛 바꾸길 주저 않는 치들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적敵이지, 아무렴 ~


이 악물자, 두 번 물자!! 교언巧言으로 이탈한 유체, 네 몸뚱이로 넣어줄라니 '_'


모름지기 기품氣品이란 오히려 희로애락 자아내는 바로 그 지리멸렬 일상 가운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민낯으로 드러나지 않던가.


해서 '원효' 또한 외식外飾으로만 기능할 뿐인 계戒에 묶이는 바 없이 간단하고도 가벼웁게 파破를 단행, '브-나로드' 할 수 있던 것이고. 이는 오직 義를 'lux mea'로 삼았기 때문으로 곧 의지依支함으로써, 법法과 자自가 따로이지 않은 자自귀의歸依=법法귀의歸依 상태에 들었기에 가능. 때문에 말 그대로 제게서 말미암는, 곧 자유自由를 구현해 보일 수 있던 것.


유사한 예로는 '예수'의 사도 임을 자처한 '바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겠다. 그이는 저 자신 '사울'이라 이름하던 때를 '바울'로 고쳐 이르며 불연속을 새겨 전기前期로 갈음, 후기後期 곧 도약 이후를 살아낸 때문. 고상高尙으로 거리긴커녕 외려 형제 속으로 들어가 권면을 주저하지 않았으니 역시 그 배경에 자리한 건 예의 그 'lux mea'. 그 빛이 어디로부터 비롯하는지는, 처처에 자리한 회당으로 보내는 서신 첫머리마다 기록된 고백으로 충분히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때문에 이 두 사람, 석가/예수 이후 동종 인류 가운데 post-자아를 자발적으로 주조한 사례의 모범으로 여길 수 있음이고.


전진前進 그러니까 나아가기 위해 필히 무릎을 꺾어야만 하는, 균형 무너뜨리는 과정 수반이 불가피. 어차피 피차 희/로/애/락 천변만화의 찰나들로 엮()는, 무상無常의 일상. 이 생활 중 오롯함으로 나투는 건 류영모 선생 말마따나 '제나'에서 거듭남으로 '솟난' 그 '얼나' 뿐.


밀알인 민초 저마다 내면에 자리한 불성佛性이라니 일체중생유불성一切衆生有佛性. 그러나 드러나기도 하거니와 묻혀있기도 한 것. 그렇다고 '원래물元來物'이 둘은 아니니 '불이不二'. 이는 <심생멸(心生滅)> 논(論)을 소(疏) 한 원효가 더하여 붙인 별기(別記)의 내용으로 좀 더 뚜렷하게 새길 수 있지 않나 싶어 옮겨 심는다.


그러나 불생멸심(不生滅心)이 생멸심과 더불어 심체(心體)가 둘이 아니며 다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마음을 취하여 둘(불생멸심과 생멸심)이 되는 것이므로, 이를 '(여래장에) 의하여'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마치 움직이지 아니하는 바닷물이 바람에 불리어 움직이는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니, 동(動)·정(靜)은 다르지만 바닷물의 체는 하나이므로, 정수(靜水)에 의하여 동수(動水)가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_은정희 역주,『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일지사


그러니 화和 가운데 쟁諍이, 또 쟁諍 가운데 화和가 이미 자리했노라 해도 과언 아닐 것. 사실 이는 '양자역학量子力學'을 가늠하는 perspective와도 닮았다. 좀 더 나아가 사람을 양자의 군집체로 본다면? 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을 내용, 기억하는 바 다시금 책을 펴 옮겨 심는다.


이미지로서 사물은 이 의미에서 저 의미로,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혹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편력하게 될 강렬도적 상태들의 시퀀스, 순수 강렬도의 사다리나 회로를 구성할 뿐이다.¹ 이미지란 이러한 편력 그 자체다. 그것은 되기(devenir)가 된다.

¹가령 아주 느리게 가는(이것도 강렬도의 한 양상인데) 자동차는, 적어도 그로 인해 답답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느림보 거북이'라고까지 느끼게 만든다. 즉 그러한 속도의 분포는 그 자동차를 거북이가 되게 한다. 자동차의 거북이-되기. 반면 속도를 빨리하던 자동차가 하나의 문턱을 넘어 미친 듯이 달리게 될 때, 그것은 광인 내지 살인-기계가 된다. 음주 운전으로 갈지자를 그리는 자동차는 술취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한다. 앞서 사용한 '이미지로서 사물'이란 말은 이런 뜻으로 보인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다른 이미지를 갖는 것, 아니 다른 사물로 되는 것은 속도 등의 강렬도의 변화에 따른 것이고, 그와 결부된 말의 사용과 결부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예에서 자동차가 그렇듯이 사물들은 가변적인 강렬도들의 연속체일 뿐이고, 특정한 강렬도에 따라 '무엇'으로 불린다. ─ 역주

_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지음, 이진경 옮김,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동문선


"특정한 강렬도에 따라 '무엇'으로 불리"는 형편이야말로 현실이라 이르는 거시계巨視界의 유동적流動的 실상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 같다. 동시에 가변可變 주체로! 힘[力]을 가加하는 편으로 전환하고자 덤비는 자체가 무리는 아닌 것이고, 오히려 인간人間 곧 사람[人]으로 되어가는 여정 사이[間]의 언저리 존재라면 더욱 적극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그래 그 에티튜드니 뭐니 이르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간 종 가운데에는 주체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동물 취급을 받고 있는 많은 '주체들'이 존재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혼동스럽게도 동물이라고 부르는, 따라서 생명을 지니고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닌 생명체는 법이나 법의 주체가 아니다.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의 대립은 동물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정치화─비록 결코 총체적일 수 없으며, 총체적이어서도 안 되지만─는 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뻔한 소리나 진부한 말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과들을 인지해야 한다. 곧 정치화에서 각각의 진전은 이전에 계산되거나 한정되었던 정치의 토대 자체를 재고찰하고, 따라서 재해석하도록 강제한다. 이는 예컨대 인권 선언, 노예제 폐지에 대해 진실이었으며, 모든 해방 투쟁, 곧 세계 도처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을 위해 진행 중에 있고 계속 진행되어야 할 해방 투쟁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법을 위협하는 것은 이미 법에, 법의 법에, 법의 기원에 속해 있다. 그리하여 총파업은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현존하는 법질서에 저항하고, 이를 통해 (…) 적어도 새로운 법을 정초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혁명적 상황을 창출하도록 승인받은 권리를 실행하기 때문이다. 좌익적이든 우익적이든 간에 모든 혁명적 상황과 모든 혁명적 담론은 진행 중이거나 도래할 예정인 새로운 법, 새로운 국가의 창설을 주장함으로써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도래할 법이 정의감과 충돌할 수도 있는 폭력을 소급적으로, 회고적으로 정당화하게 될 것처럼, 그것의 전미래는 이미 폭력을 정당화한다. 모든 국가의 정초는 우리가 이처럼 혁명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새로운 법을 창설하며, 항상 폭력 속에서 창설한다.

_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법의 힘』, 문학과지성사


어쩌면 화和 vs 쟁諍 간 '영구적 변증'이야말로, 역사의 실체로서 '진보'일지 모른다. 다시 화和 안에 쟁諍이, 쟁諍 가운데 화和 임을 '안다'면 거리를 둔 채로 점잖떠는 것이야말로 제 안녕을 구하는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먼저 그러려는 자신이 알아챌 것.


그러니 니체가 이른 '위버멘쉬' 곧 '초인超人' 또한 남다른 우월쯤으로 오해하는 사정을 두고 보면서 오히려 부추기며 이득 취하자 덤비진 않겠지. 차라리 사람[人]으로 되어가는 여정 사이[間]의 언저리 존재가 바로 그 자신 처하여 있는 그 언저리를 벗어남을 뜻하는 것이야말로 예의 그 '초인'의 실체 임을 제 모습으로 보이는 데에 전력투구 하겠지.


구체적으로는 김진석 선생이 표현한 '소내疎內'를, 욕망이 자리하는 처소로 기능할 뿐이던 자기 내면부터 갈아엎는, 욕망을 따돌리는 주체의 자발적 행위로 이해하고 감행. 이로써 비자발적으로 경험하기 일쑤인 '소외'의 대척에 서게 되니 '초인'에 부합하는 태도 아닐까 싶다.


이렇게 자기 안팎을 뒤집는 초인-되기를 저마다 실행 시, 바닥을 기던 그야말로 포복匍匐 연속이던 민초로 어림 곤란하던 '초월超越' 또한 '포월匍越'의 연대로 자리하게 되어 그 구체성을 실감하지 싶고. 이로써 낱알의 '씨알'인 민초가 비로소 자기 안에 '군주' 빚으니 '시민 군주' 주조함이고. 이를 대리 playing 할 role에 '해장국 리더'의 상을 앉혀 위임할 수도 있을 것.


이즈음에 부합하는 '해장국 리더'의 그릇이라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방편으로 낯 붉히며 다투는 데 거리낌 없는 상일 터. 오히려, 그래야 한다면 임전무퇴臨戰無退!! 적극 감행하는 편에 '시민 군주'는 힘[力]을 가加하지 싶다.


'정부 실패' 두렵다고 '시장 실패'를 방관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더하여 적극 개입 밀어붙이는 과단성이 요구되는 때, 그야말로 시의적절 이를 수행함에 적합한 이들을 중심으로 바뀌지 않을 수도 없겠다 싶고.


아니 될 게 무언가?

Wh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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