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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Mar 07. 2021

쿨 to the 힙,노마드?
하루키-드의 변덕!?

사각공간- 시간, 공간, 인간, 행간

 국내 유수의 작가(신K숙, 조경R, 윤대N, 김영H, … 김연S, 박M규 등 소위 문단 내內 통뼈로 등장했든 제 잔뼈를 굵직하게 키워냈든 간에)부터 신진까지, 더하여 SNS 확산과 함께 '나는 ~ 이 좋다'를 쓰기의 전범典範처럼 공유(?)하며 하나의 전형으로 굳힌 일반에 이르기까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친 영향이라면 폭넓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 싶다. 아, 시詩에 산문이 경향으로 자리하게 된 데에도 한몫하였달지. 물론 전적으로 빚진 바라 할 순 없겠다. 거칠게 마름하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간 비약 무릅쓰자면 아주 그릇된 재단 만은 아니지 싶고. 그렇다고 전에 없던 바 불현듯 등장 또한 아니어서 그저 그를 기점으로 성립된 붐의 일종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그나마 적합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누구든 할 수 있지만 막상 아무도 저지를 생각 못하던 때 등장, 과감을 관철함으로써 밖으로 보였달지. 예컨대 한국말로 랩을, 그것도 유려하게 구사하는 서태지의 등장? 뭐 이런 느낌이라면 좀 수월하게 가닿을지 모르겠다.*


 일러두고 보니 소위 하루키즘, 이 자장磁場 느끼는 바 새삼 대단하다 싶기도. 그의 소설을 비롯한 작품에 등장하는 마라톤, 재즈 그리고 고양이 애호에서 맥주를 비롯한 상품 브랜드를 특정하여 소비하는 형식 모두. life에 나름의 style을 부여, '자기만의' 삶으로 일구어내는 방식의 모범으로 세간에 들어서니 작중 나열된 기호품을 그대로 따라 소비하는 데서부터 취향을 등치 시키는 등의 호응은 꽤나 열광적이었다. 한편 이런 세간의 흐름에 조응, 응원에서 우려 내지 경고까지 다양하다면 다양한 비평 또한 쏟아지며 한때를 달구었고.


 물론 이런 스파이럴(?), 하루키 홀로 이룬 건 아니다. 냉전 종식이 마냥 평화롭게만 느껴지지 않던 세기말 '거대담론 붕괴'로 의지처 잃고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방황 중이던 미시적 존재로서, 이미 무너진 사상누각 터에 저마다 자기 자신 만의 '공중정원' 마련이라는 쪽으로 주의 환기시키는 미니멀리즘에 혹하지 않을 수 있으랴. '대문자 역사'가 주도하던 흐름의 변화와 함께 개인 역시 저를 둘러싼 껍데기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기 시작하였으니. 도처에서 봉기하는 자아들로 인한 균열이 전/후를 갈음하여 마침내 새로이 세勢를 구성할 것임을 가늠, 먼저 균열 징후를 '동시다발'로 묶어 형언하여 가시권 범위 내로 들게 하면서 이를 촉발, 당긴 것. 이 형언의 라인 첨두에 선 이 가운데 하나가 하루키라고 할까. 대중적 소비 차원으로 보자면 말이다.


 이렇게 형언으로 심연의 소용돌이를 어림하면서부터, 원인 되는 갖가지 감정(바깥 타자/세계와 관계하며 빚게 마련인)들을 code화, 자기 자신이라 여기던 물건/구조를 해석하는 데 이르기까지. 이를 바탕으로 부합하는 서로 간 끼리끼리 sync- 또한 용이해져 전에 없던 소통 실감. 닷컴이 주도하여 온라인에 구축한 커뮤니티 장場에서 함께 주거니 받거니 권커니 잣거니 가속 페달 밟은 격. 이로써 트랜스 겪는 사회상, 최근 '클럽하우스'와 같은 closed-circle 형성에까지 이른 것뿐.


 그런데 세월만큼 무뎌졌음인지, 구조 해석이 부실한 탓인지. 스타일 부재를 기호 소비로만 메우려는 듯 안달인 모양새가 곳곳에 산재散在. 하긴 여유에서 비롯하니 호사豪奢인 만큼, 이를 열망하는 처지에서야 바로 그 여유를 상징하는 '취향'을 등치시켜서라도 소위 '누리는 삶'을 실감하고파 할 수 있겠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다만 무산계급에 가까운 형편일수록 유사 체험에 그치게 마련인 과시 아닌지. 이에 빠져들수록 공허/허탈감은 불가피한 부산물. 이를 가시게 하겠다고 더욱더 과시에 몰입해봐야, 종착은 헛헛함이 덧없음으로 옮아가 기어코 이르게 마련인 (자기)파괴 지경.


 소위 cool에서 hip까지 trend-setter이든 추종이든 간에 마치 참신을 바탕으로 변모를 거듭하는 듯싶지만 실상은, 처한 현실과 유리된 판타지를 도피처로 소비하는 데 그칠 뿐이지 않은지. 때문에 개개의 하루키 호/불호와는 무관하게기호 소비에 동참하여 과시/전시 연속하며 저를 드러내는 일률一律에 복무하는 천편千篇으로 의도와는 상반된 몰개성의, 무늬만 하루키-드[haruki-d]로 간단히 묶이고 마는 게 아닐지. 이를 두고 소위 nomad라 일컫는다면 어불성설일 것. 미끄덩~ 미끄럼타기 연속하는 유연이기보다 그저 한낱 변덕變德에 불과(이렇게 유동流動하는 변덕과 궤를 같이 하니 다름 아닌 자본. 때문에 21세기형 enclosure-movement인 젠트리피케이션은 지속될 밖에). 자기-소외에서 비롯하는 결핍을 가늠하는, 구조 해석 부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증거일 따름. 갈급을 자아내는 근본 원인을 제대로 파악 뒤에야 따르느니 온전한 처방. 이 과정 생략, 진통제로는 마취에 불과. 당초 '무엇 무엇이 좋다' 등으로 늠하고 설명하는 자신부터 의심하는 데서 비롯하는 방황이야말로 휩쓸리지 않는, 속지 않는 방편의 시발일지도. 민民인 제 처지에서 주主로 굳건한 채 병렬이면 굳이 인위로 조명, 새로이 관심 견인 불필요. 이에서 거리 둘수록 붐을 인위 조성하려는 작전질의 전장으로 현실은 market+ing. 그런 한편에서 신념에 진심인 편인 유아독존조차 외려 독불장군 외골수의 비틀린 고집으로 왜곡되기도.


 육신 안에 거하며 지상에 발 붙인 존재로 속물俗物 아닐 수 없지만 반드시 그 속俗에만 충실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기에 '인간人間', 곧 사이[間]의 존재[人]라 이르는 게 아닐지. 어쩌면 하루키가 표하려던 개인, 그리고 이에 감응한 국내 작가들 저마다 제 시각으로 담은 작중 화자들을 관통하는 특징이라면 바로 이 부조리 감각 이후 방황 연속하며, 우연 가운데 얼마간의 체념과 함께 나름의 필연을 주도하려는 것일지도.



* '유수의 작가명', 내 뇌-피셜이니 밝히지 못할 것도 없지만 딱히 밝힐 필요도 없다 싶어 생략. 아울러 표절 시비 또한 본 전개 내용과 무관하여 패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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