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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May 05. 2021

"공생공락의 즐거움 (…)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https://project100.kakao.com/project/10341/activity?daily=38

블라인드 페이지. 38일차

【블라인드 페이지】- 38일차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대답을 거부하는 <그분> 대신 나는 스스로에게 답했다. <내가 사는 이유는 앞으로를 살기 위함이다.> 내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불확실성은 다 무엇이며 이 고통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앞으로의 삶을 믿을 수가 없다.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질문을 던지기 전에는 나도 삶이란 것을 믿었지만, 이제는 믿을 수 없다. 믿을 수가 없다. (…) 나는 간구하는 중에도 위안이 아닌 휴식을 찾았다. 어쩌면 나는 신에게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거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 나는 신을 믿지 않으면서 간구하고 있던 것이고, 그래서 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신과 거래를 했고, 신을 비난했다. 한마디로 나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_본문 일부 발췌


https://project100.kakao.com/project/10341/activity?daily=39

블라인드 페이지. 39일차

【블라인드 페이지】- 39일차


 조그만 한 개의 기쁨을 찾아, 그는 남대문을 안으로 밖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불어드는 바람도 없이 양옆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서너 명의 지게꾼들의 그 모양이 맥없다.

 그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에 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와 친해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직업의식은 어떻든 좋았다. 다만 그는 고독을 삼등 대합실 군중 속에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오히려 고독은 그곳에 있었다. 그가 한옆에 끼어앉을 수도 없게시리 사람들은 그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도, 그들의 누구에게서도 인간 본래의 온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네들은 거의 옆의 사람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네들 사무에 바빴고, 그리고 간혹 말을 건네도, 그것은 자기네가 타고 갈 열차의 시각이나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네들의 동료가 아닌 사람에게 그네들은 변소에 다녀올 동안의 그네들 짐을 부탁하는 일조차 없었다. 남을 결코 믿지 않는 그네들의 눈은 보기에 딱하고 또 가엾었다.

 _본문 일부 발췌


https://project100.kakao.com/project/10341/activity?daily=40

블라인드 페이지. 40일차

【블라인드 페이지】- 40일차


소비자 시장은 공생공락 모델들의 매력 속에 감춰져 있던 상업적 가능성들을 찾아내 탐욕스럽게 상품화해왔다. 다른 수많은 사회적, 윤리적 충동들처럼, 공생공락의 모델들도 상품화되고 대개는 브랜드 로고가 찍히게 되었으며 GNP 통계에도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GNP 통계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지금으로서는 그 추세를 막을 수 없다….

 따라서 문제(아직은 경험에 의거한 확실한 답이 없는 문제)는 과연 공생공락의 즐거움이 하나같이 무한한 경제성장이라는 목적으로 귀결되는 부의 추구의 즐거움, 시장이 공급하는 소비재들의 향유, '남들보다 한발 앞서기' 등을 대신해 행복한 삶의 비결로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컨대 공생공락의 즐거움이 아무리 '자연적'이고 '고유하고'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라고 해도, 우리가 마케팅의 영향을 무시하고 공리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현재 널리 퍼져 있는 사회 형태 내에서 그러한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_본문 일부 발췌

☞ '할 수 있는가?' 과연..?

물론 제 의심을 확대, 기어코 비관에 이르는 정신이라면 건강하달 수야 없지만.


☞ 30일 심야책방 마치고 제법 굵직한 미션 다시 거머쥔 느낌. 요새 유튜브 영상마다 따라붙는 크리넥's 물티슈 광고처럼, 정리 못한 데 따르게 마련인 찝찝함에 내내 좀 그렇더니, 깔끔하다면 깔끔하게 마음 다질 계기 되찾은 듯싶어 나름 고무적. 새삼스럽지만 죽는 날까지 청산 지속하자 싶다.


☞ 그건 그렇고 자기 밖을 어림하여 가늠치 못하는 '단순'. 이 역시 그런 형편 안에선 '명확'일 수 있다. 다만 경내에 갇힌 신념, 그 도그마가 끼칠 오염을 염두에 두면야 더 말해 무엇.


한편 '공생共生'도 난맥이건만 '공락共樂'이라. 하긴 때문에 지속 가능한 '추구'이겠지. 갑갑x답답 콜라보, 삐걱임이야말로 네추럴이라 여기고 붙들면 정신일도精神一到와 다르지 않으니, 그야말로 하사불성何事不成, 꿈은 이루어질 법.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 또한 모두 사람의 일. 특히 '마케팅의 영향'도 好, 액세서리로 그만인 '공리주의'의 외형도 好. 항시 문제를 초래하는 건 양손에 떡 쥐려는 그 욕심 때문. 화근이 제 속에 있음을 알아서 그로부터 달음질 하려니 문제적 인간과 문제적 텍스트가 이 땅에 출현하기도 할 텐데.. '현재 널리 퍼져 있는 사회 형태 내에서 그러한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당초 그게 즐겁긴 한가?! 당장의 입장에선 즐거운 경험 제공(처)로 기능하는가?? 같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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