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믿는다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개과천선改過遷善, 정말이지 말 그대로다. 천선遷善 하려거든 개과改過 함이 마땅하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보다는, 선善에다 시선 거는 순간 그에 비추이지 않을 수 없는 게 곧 제 과거/행적. 따라서 필히 성찰이 우선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라 여기는 편이 자연스럽겠다. 그러니 성찰 부재여서 개과 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상태로 천선 하였노라 주장한들 죄다 뻥-구라 show 밖에 되지 않겠지. 이게 길게 이어질 리 만무. 글쎄 뭐 사람의 일생, 한 세대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한 세상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란 식이면.. 어쩔 수 없겠다만 그래도 생각을 한다는 인류로 태어나 고작 탐/진/치에 함몰된 채로 마감이라니 이 얼마나 좀스러우냐;; 죽은 뒤에도 부활 거듭하는 게 생전의 행적. 따라서 인간임을 자임하려거든 적어도 부끄러운 편으로는 역사歷史 조형 말아야지. 기록되든 기록되지 않든 간에 말이다.


그(*친구)의 말을 듣고 자꾸 아내에게 폭력을 가해서 고통을 주었던 내 죄를 나는 도저히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 (…) 힌두의 아내가 법정에 가서 이혼을 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법률이 약이 될 수 없다. 내가 내 아내를 그러한 궁지에다 몰아넣었던 죄를 나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그 혐의의 암종(癌腫)이 뿌리 뽑힌 것은 내가 아힘사(Ahimsa:비폭력)의 뜻을 모든 면에서 이해한 다음에야 된 일이다. (…) 아내는 남편의 종이 아니라 짝이며 돕는 자요, 그와 고락을 같이하는 동반자로서 남편과 꼭 같이 자유로이 자기 길을 택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심과 혐의로 캄캄했던 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어리석음과 잔인한 치정이 혐오스러워 가슴이 꽉 막히고 내가 맹목적으로 친구를 믿었던 것을 통탄하게 된다.

_『간디 자서전』, 한길사


처음 접했을 적엔 심경 복잡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간디'조차 친구를 핑계 삼는 듯싶어서. 넓게 보면 이 또한 인간미 아닐까 하는 정도로 대강 넘겼는데. 아뿔싸 이런 태도야말로 멋모르고 까부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뭣도 모르면서 뭣이 중한지도 모르면서 내내 까서 부는 데에 지나지 않았던 것. 이 느낌, 첫 읽기 후 사는 내내 실감 중 -_-;; 알고 저지른 바는 물론이거니와 모르고 벌인 일까지 회피 않고 직시, 그러니까 면면을 낱낱이 살펴 의義로 달아보는 자체가 사실 멘탈 재건축과 다를 바 없는 대공사¹. 그러니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더더욱 '간디'는 그래서 '간디'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반면 '나'는 할말하않;; '내' 편의/이익을 먼저 셈하는 동안 기울기를 거듭하던 이 속내;; 게다가 이를 감추기에 급급하던 시절을 지나며 점점 뻔뻔해져서는 아예 대놓고 '잣대'랍시고 변명하니 그 순간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 남았던지 꿈틀. 하여 계속해서 부대낌 불가피. 하면 성찰을 도끼 삼아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 그러니까 전前/후기後期로 자신을 쪼개야 마땅한데 아니 이 어려운 걸 내가 못해, 안 해. 말장난이지. 어려워 못하겠다며 물러서서 안 하는 것뿐. 왜냐하면 '내'가 '나'로 여전如前이어서 중심에다 자신을 붙들어 둔 채 놓지 않았기 때문.




이미지로서 사물은 이 의미에서 저 의미로,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혹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편력하게 될 강렬도적 상태들의 시퀀스, 순수 강렬도의 사다리나 회로를 구성할 뿐이다. (본문)

가령 아주 느리게 가는(이것도 강렬도의 한 양상인데) 자동차는, 적어도 그로 인해 답답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느림보 거북이' 라고까지 느끼게 만든다. 즉 그러한 속도의 분포는 그 자동차를 거북이가 되게 한다. 자동차의 거북이-되기. 반면 속도를 빨리하던 자동차가 하나의 문턱을 넘어 미친 듯이 달리게 될 때, 그것은 광인 내지 살인-기계가 된다. 음주 운전으로 갈지자를 그리는 자동차는 술취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한다. 앞서 사용한 '이미지로서 사물'이란 말은 이런 뜻으로 보인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다른 이미지를 갖는 것, 아니 다른 사물로 되는 것은 속도 등의 강렬도의 변화에 따른 것이고, 그와 결부된 말의 사용과 결부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에에서 자동차가 그렇듯이 사물들은 가변적인 강렬도들의 연속체일 뿐이고, 특정한 강렬도에 따라 '무엇'으로 불린다. (역주)

_들뢰즈/가타리,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동문선


역자 이진경 선생이 달아둔 주석. 그런데 이 '강렬도'에 대한 설명은, 원효의 『대승기신론 별기』 내용과도 겹치는 듯.


그러나 불생멸심(不生滅心)이 생멸심과 더불어 심체(心體)가 둘이 아니며 다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마음을 취하여 둘(불생멸심과 생멸심)이 되는 것이므로, 이를 '(여래장에) 의하여'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마치 움직이지 아니하는 바닷물이 바람에 불리어 움직이는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니, 동(動) · 정(靜)은 다르지만 바닷물의 체는 하나이므로, 정수(靜水에 의하여 동수(動水)가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권2, '심생멸心生滅' 관련 첫 '별기別記', 별기의 한자 원문은 생략)

_『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은정희 역주, 일지사


그야말로 일심이문(一心二門), 이문일여(二門一如). '강렬도'의 그라디언트를 염두에 두면, 문門은 13개 아니 여러 개여도 상관 없소 ㅋㅋ 이 앞에 서니, 스스로는 바꾸지 않으면서 '나' 이외 사회상이라든지가 절로 바뀌길 바라는 '내'가 비치는군. 거울 속인 줄 모르고 마치 실상인 양 착각함과 매한가지 아닌가. '거울속에는 소리가 없'²으니 '호령하여도 에코-는' 커녕 묵묵부답에 복지부동하겠지, 쯧. 아니라고 부정해본들 곱씹을수록 내 탓임이 자명.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하지 않을 뿐. 참말로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³내고 있구나. '나'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⁴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데에 이르러 거듭 살피니 '간디' 또한 앎에서 이해로 나아감에 의義에 기댄 바와 다르지 않은 듯. 알고 이해함으로써 폭력에 머물기를 그치고 비폭력으로 나아간 '사람'이, 비로소 눈에 띔(아, 내가 소경이로소이다. 이 눈에 들보 어쩌누. 내가 나의 원수여;;).


여기서 『간디 자서전』 옮긴 함석헌 선생이 남긴 바를 살핌.


나는 본래 맏아들이었으므로 자연 특권이 붙어 있었습니다. 위에 고모도 있고 누님도 있었지만 먹는 데서는 언제나 내가 제일 위입니다. (…) 채마밭에 들어가니 다 늙어가는 넝쿨 밑에 오이가 하나 달렸는데 아직 어려서 먹을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래 며칠 기다렸다 (…) 그럴 만한 날이 되어서 가보니 없습니다. 우리집에 불문율로 당연히 내 차지인 것을 감히 누가 먹었을까? 알아보니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이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 내 것이다 선언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특권 의식에서 나온 횡포였습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것을 나는 구박을 했습니다. (…) 어머니는 부드럽고 미는 듯하면서도 단연한 목소리로 "얘 그건 사람 아니냐?"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 그 음성은 늘 살아 있어 내 속에 몇 번을 부르짖어졌는지 모릅니다.

_'나의 어머니', 함석헌 전집 4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한길사


이리 보고 저리 살펴도 틀림이 없다. 부러우면 지는 건지는 모르겠고, 부끄러우면 '내'가 그른 것임은 확실!!

이상을 종합하면 이기利己와 이타利他를 양극으로, 사람은 제가 처한 곳에서 마주하는 매순간 제 면면을 자기 중심의 묽고 탁한 정도 곧 농담濃淡으로 드러내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부끄러움을 실감한 이라면 될 수 있으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편에 서고자 할 것이고 그 일면을 고수하려 들게 됨은 당연할 것. 그러니 '사람 고쳐 쓸 수 없다'는 속설을 남이 아닌 자기를 평가하는 잣대로 삼아 제 부끄러운 과거를 돌이키는 데서 부끄럽지 않은 현재를 새로운 과거로 쌓고자 할 것.




이제 겨우 개과의 초입에 닿은 듯. 과거 '나'는 어떠했나. 부러 살피지 않아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알머리로 사리사욕 채우려는 욕심꾸러기. 이를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넘겨준(이 또한 당시 '내'게 일시적/일회성으로 보인 모습일 수도 있으나 그럴지라도 그 또한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알면서 속아주었다는 팩트, 그 바깥은 아닌 만큼 모두 포함하여) 분들 함께 떠오른다. 부대낌 심해지고 빈도 늘수록 그이들 마음에 자리했던 바를 미루어 짐작하여 보는 일도 잦아졌는데 매번 같은 결론에 이르니 다름 아닌 믿음이었지. 그네들 처지에선 아마도 이 '내'가 스스로를 부끄러이 여길 때를 맞닥뜨리게 될 것을 자신이 겪은 바에 비추어서든 알고 있었을 것이고, 해서 그때에 이르면 그래도 돌이킬 수 있으리라는, 돌이키리라는 믿음을 사랑으로 실천한 게 아니었을지. 이 못난 사람을 오래 보아주시는 분들은 특히 그러한 듯싶다. 해서 여러분이 믿어주신 바에 따라 오늘에까지 이를 수 있었음을 상기하며 그 믿음 헛되지 않았음을, 헛일로 돌아가버리지 않음을 여생餘生으로나마 증명하자 싶어 조용히 마음 다지는 것.


거울 밖으로 나서야지. 개선의 면을 죽는 날까지 일관되게 고수하자 마음부터 단단히 동여매는 것이지. 어렵겠지. 그래도 일로매진하려는 노력 만이 '사람 고쳐 쓰지 못한다'라는 속설의 완강함을 무너뜨릴 것.


How To?!

Know How는 다음 인용부가 제격!!


─ 우리의 삶이 끝내 지향돼야 할 어떤 푯대[目標] 같은 게 있을까요? 바울의 말을 연상해서 묻습니다.(송기득)

□ 바울의 말 그대로,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실현해내는 것이지 뭐. (…) 그러나 이땐 내가 실현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그이'가 실현하는 것이니까. (함석헌)

_송기득과의 대담 '人間을 묻는다', 함석헌 전집 4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한길사


'내' 의지 아닌 바람직한 의義에 기댄 바이면 따로 걱정할 일 있나, 없지.

방황 중인 탕자이면 어떤가. 저와 비슷한 처지를 헤아리는 데에는 밝을 수 있으니 유유상종이라 하여도 그 쓰임에 충실하면 그만.

모르면서 함부로 행함에 서슴 없던 '나'도 이를 수 있는 곳이니, 이런 '나'보다 낫다 여기는 분이야 이쪽에서 감히 可/否 曰曰댈 필요도 없겠고. '나'처럼 어려워 못하겠다 여기던 유사한 처지라면 못할 것 없겠다 싶을 터.

그러니 나는, 그저 믿고 믿는 바를 실천코자 애를 쓰며 살면 되는 것.

낱낱의 believe가 스크럼 짜면 Trust 구조 이루는 게지. 아무렴. 신의 형상은 이 연대 안에서 복원되는 것이겠고.

따라서

나는 믿는다.



※ 여시아문/술이부작을 벗기 어려움을 매번 실감하는 터이기도 하고, 하물며 자본주의 하 상점원이면 저가 취급하는 재화/상품의 재원 등에 밝아야 함이 기본인데 그 재화/상품이 책인 서점원 입장에서야 당연하다 싶어 매번 출처 명기, 전거 밝히는 데에 애를 쓰는 편. 솔직히 난 뭐 그 '큐레이션' 운운 자체를 썩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 편인 게.. 첫째로는 이미 출판 단계에서 필터링 거친 것이니 공간 면적이나 매대 형태 크기 등의 물리적 요소와 함께 나름의 기획이랄지 콘셉에 들어맞게 구성하는 건 특별한 활동이 아니라 당연한 것. 물론 후자가 변별 가능한 차이 낳겠는데 아니 그러려면 저가 취급하는 상품/재화에 대해 좀 알아야겠지. 그런데 책의 경운 알려들면 들수록 본인부터 변하게 마련. 그런데 그런 모습 보이지 않는 편에서, 그러니까 본인 앞도 가리지 못하는 형편에서 함부로 권한다는 게 어디;; 게다가 이미 있는 말글보다 못한 것을 품品으로 꾸며 내놓는 것도 경계해야할 판에, 외려 그로써 명성이니 재부 따위와 맞바꾸려는 데에 혈안~~;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은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 관심도 없다. 공부工夫-되어 얻는 즐거움에 비할쏘냐. 아무쪼록 저와 같은 처지에 계신 분이 언급되는 책을 접하여 읽게 된다면 그로써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을 듯.



¹ 부대낌에 지쳐 돌이키며 다른 곳 아닌 이 내면에 정주定主할 공간 마련에 힘을 쏟는 게 옳겠다 싶었음. 그러자니 다른 누구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공부工夫-되기는 필수였고. 이처럼 나름의 공부, 하려니 절로 새겨지는 공부의 의미였음. 이야 참 신기하고 놀라와 ~ *_*

² 이상,詩 「거울」

³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민음사

⁴ ibid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죽음..을 흔하게 다루는 세상에서 그(녀)는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