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작년(19년 3월) [대화의 희열 2] 백종원 편 시청 후,기 옮겨 심음.
서점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임하는 자세를 다시 점검하자 싶어서.
1. '차이'를 이루는 디테일, 옳다.
그러나 '점포 개발'로 아우르면 그만인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먹일 필요도 없겠다. 왜냐하면 '재방문율'이니 하는 정도조차 헤아려 볼 생각 않고 창업하려는 이가 곁에 있다면 이를 문제 삼고 말릴 정도의 수준을 갖춘 이들은 그래도 꾸준히 늘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 물론 아직까진 평균이라 이르긴 무리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전체 인구 구성비 중 차지하는 비중을 꾸준히 늘여가고 있지 않나 싶다(이렇게 믿어요, 나는 '_'). 이를테면 상권 분석 운운하는 틀거리 내 추상화된 평가 조항, 조건 나열 정도는 어지간한 상대商大 학부생만 되어도 줄줄 읊고도 남을 것.
그렇다면 진정 '차이'는 어디에 기인하나?
취取하는 정보의 질質에서 비롯할 것. 운용 가능한 재력의 범위, 이를 결정하는 지위/위치에 들면 굳이 파고들지 않아도, 알기 싫어도 절로 알게 되는 것 또한 적지 않겠지. 위치에 서는 누구든, 지위를 점한 이라면 누구건 알려고만 들면 힘들이지 않아도 알 수 있기도 하겠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 정보의 독·과점을 꾀할 수 있는 '자리'에 한 번 발 들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죄다 그 자리를 사수하려 드는 것. 이를 뒤집어 이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이겠고, 과거에 기대어 이르면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 읊는' 지경.
평가 절하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신화를 경계하자는 것뿐.
백종원 씨가 대표(이하 백대표)였기에 손쉽게 취득하였노라 말하려는 건 아니고. 백대표 경우 외려 그 반대일 것. 내 기억하는 바로 오래전 EBS의 한 프로그램에서 그를 취재 소개한 바 있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사무실 한켠, 벽면 1단 서류장 위에 가로로 쌓아둔 슈트케이스─15개에서 20개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를 가리키며, 각국 형편에 걸맞도록 미리 짐을 꾸려둔 것이라 했었다. 이유인즉 시간이 없어서, 그 시간을 아끼려 궁리 끝에 그리하였노라 일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보충 설명 필요하겠다. 목적은 짐작과 다르지 않겠다. 음식을 둘러싼 갖가지 경험을 수시로 현지 탐방 통해 직접 취하기 위함이다.) 그이를 지금 그 자리까지 올려놓은 데엔 이와 같은 그 자신의 노력이 굳건한 받침으로 분명하게 작용하였을 것. 양질의 정보를 얻기 곤란한 자리에서도 그는, 스스로 머리를 굴리고 손을 놀리는 한편 발로 뛰어 정보를 취득/가공, 제 것으로 취하였을 것이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자신도 그와 같이 할 수 있다 이르는 사람, 적지 않다. 아니 많지. 그러나 그리 행하는 이는 드물다. 정말 드물다.
2. 중산中産이 두터운 층層을 이루고 있는 편이 안정적임은 대부분 안다. 아니 느낀다.
다만 이러한 형태는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 대동소이大同小異 하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는 있을지언정.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이아몬드'形을 '마름모'로 바꿔 이르는 정도를 두고 '차이' 운운하는 건 낯간지러운 일. 실實 없는 찬사라면, 주고받는 양편 모두 맥 빠질밖에. 그래도 공치사 주고받겠다면 그리해야겠지만 이는 주고받는 상간의 사정일 뿐. 들러리/갤러리라면 굳이;;
한편 이를 빌미삼아 부화뇌동附和雷同 꾀하는 치도 존재. 사기와 애매한 경계에 자릴 잡고선 제 이익 추구에 열 올리는 작자들;; 사정에 밝지 않은 이들을 속여 제 이익을 꾀하는, 그런 수준과 정도를 차이로 내세워봐야 아니 그러니까 너는 삼류.
백대표를 두드러지게 하는 '차이', 그가 돋보일 수밖에 없는 지점이라면 차라리, 타他의 추종追從을 허許한 데에 있겠다(동시에 불허不許와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는 자신감自信感이겠고). 그는 남들이 제 소유로 감추려 애를 쓰는 recipe를, 매뉴얼을 오픈/열어젖혀 누구나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다 여기)도록 제공한다. 이로써 그는 자기를 타인과 구별지음과 동시에 개중 자신을 뚜렷하게 자리매김시킨 것. 비법이라면 바로 남이 중하게 여기는 바를 사사로이 여겨 내어줌으로써 타인이 미처 돌보지 않은 것을, 돌보지 못한 것을 취한 데 있겠다('인연'을 중시한다는 그에게서 삼국지의 '소쌍'이 겹쳐 보이는 건 당연하지 않을지).
3. 다시 마름모.
그래 옳다. 다만, '마름모에서 낮추면 그걸 차릴 이유가 없다. 다른 문구 숍이 있기 때문에'라고 나름의 문구 편집숍 창업에 대한 포부를 피력한 김중혁 작가의 견해에 공감하며 기대어 이르고픈 말. 이것이 후기를 남겨두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서/그러니까) 가게를 하면 안 되겠구나'라며 마무리된 그 견해의 속살이란
─ '마름모'의 중위를 차지하는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할 만한~ 을 전제로 재단/편집된 바로 백대표와 같은 업주는 굳이 이르지 않아도 될 말이었을 테고 김중혁 작가는 말로 일러봐야 별무소용 뻔하니 이르지 못한 게 아닌지. 이렇게 보면, TV를 비롯한 그 액정이야말로 송출 콘텐츠의 자기검열을 돕는 사각四角의 물리적 프레임으로써 21세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겠다(침대는 정말이지 현대의 사고를 마름하는 과학이 되었구만).
굳이 '풉'하던 백대표의 웃음을 끌어대지 않아도, 수익을 염두에 두고서 이를 쫓는 흐름 그러니까 이 자본주의 서사에 비추어 보자면 (비)웃음 사기 충분하겠다. 그래 옳다. 백대표가 이른 마름모에 속한 중위를 겨냥하는 것이야말로 정견. 옳다.
그러나 그 (자본주의) 서사 만이 바람직한가 물을 수 있어야겠지. 이런 물음, 정말 쓸모없는가? 기존 서사 안에서 바람직하다 여기는 것들 만을 택할 자유 말고 그 서사 자체를 바람직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데로 자유는, 확장될 수 없는 것일까. 선택 범위를 서사로까지 옮겨갈 수는 없는가. 의구심 떨치지 못하겠다.
그래, 그래서 '나'는 이러고 산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살려 한다. 이렇게 살고자 하며 이리 살겠다. 그리고 아니 그래서, 적어도 몇몇은 이처럼 누군가 혀를 차는 지점에서 그 밖을 상상하며 뚫고 나가려 들 거다. 어쩌랴, 끄달리는 형편도 제각각이게 마련. 다르다, 다르니까 다르면 다른 그대로 그저 저마다 끌리는 바 그 편을 분명히 하여 택할밖에. 그러니
'토씨 찾아 천지 떠도는 이가 먹는 밥, 비웃을' 필요 없겠다.
방황이야말로 속지 않으려는 자의 특권!
그러니 작정한 유랑,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슬퍼하거나 비웃는다 노여워 할 이유 또한 없겠다.
휘슬은 off-side 감행 후에나 따라붙는 것.
'마름모' 상단*에 가까울수록 송곳 끄트머리 아닐까.
낭중지추의 전위 또한 이런 형태로 자리하겠지.
그곳에 계속 쓰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 책 엮어 펴내는 이도 모이겠다.
그 언저리에 서점이 들어서는 건 당연하잖은가.
* 상단이라 해서 우/열 서열의 위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세간의 방식과 시선으로 이르자면 외려 그 반대편. 저변/언저리, 그러니까 낮은 데에서 마름모의 중위 하단 그 어디쯤이겠지. 서점이 들어서기 적당하다 뿐인가. 최적은 둘째 치고 꼭 들어서야 하잖나 싶을 따름.
붙임: head 삽입, Photo by Gilbert Beltra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