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수신'하면 '치국'은 물론 '평천하'까지 해야 마땅한 것처럼 배우고 익히는 학제에서 서열을 떼어놓으려는 발상은 애초에 무리일지 모른다. 한편 한계를 가늠하고 실현 가능성을 점치며 용의 꼬리든 뱀의 머리든 취하려는 욕망의 축소 지향을, 그 무슨 대단한 결의인 양 포장하는 것도 열없고. 그래봐야 체념의 자위에 불과한 실체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으니. 와중에도 '내(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자신이라 여기는 이 물건을 속속들이 탐구하는 시간마저 아껴서 (바로 그 물건을 이르는) 이름을 날리라는 명령은 힘이 세다! 마치 DNA에 프로그래밍 되어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생일대의 과제처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종횡무진 21세기를 가로/세로 질러 다니느라 인간種은 바쁘다.
그런데..
이처럼 '중심에의 열망'으로 구성되는, 그 열망을 지표로 평가 객관화하여 서열 매기는, 주류 서사에서 그 중심 자체를 (다시금) 바깥 아닌 자기 속내/안쪽으로 옮겨놓는 별종의 출현이라니. 이형異形의 등장, 이건 사건이다. 특종이지. 탄생의 기원을 규명할 수 없는 우발적 존재가 생명활동을 유지하면서도 그 생활에 함몰되지 않고 자기 탐색을 지속한다는 자체가 기이하면서 흥미롭잖아. 왜냐하면 보통은 '왜'라는 질문을 지우고 오르는 데에만 힘쓰게 마련이니. 이 흐름을 거스르며 물음표를 매단 채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낙하, 마침내 바닥에 엎드리기까지. 그리고는 오체투지의 꿈틀거림으로 궤적을 남기기까지. 이것이 마침내 하나의 길로 변화하기까지. 이 과정 전반이 그저 신비롭다(신기하기도 하고).
진리는 분명 있네. 그러나 자네가 바라는 '가르침',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그것만 있으면 지혜로워지는 가르침이란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 하네. 신성(神性)은 개념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안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싸울 각오를 하게, 요제프 크네히트.. 투쟁은 벌써 시작됐네.
_헤세, 유리알 유희(민음사)
'주리고 목마른 자 내게로 오라'더니 '마르지 않는 샘'은 어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고 이미 내 안에 있단다. 그래 괜히 '일체중생유불성', '불립문자 교외별전'이 아니겠지. '겨자씨'만 품어도 '오병이어五餠二魚'가 끝없이 솟구칠 것만 같은 믿음을 불러 일으킨다. 지면 위의 활자야말로 기적의 화수분일지도.
"정열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력이 아니라 영혼과 외부 세계 사이의 마찰일 뿐..
욕망의 추진력을 극도로 집중시켜 중심으로, 참된 존재로, 완전으로 향하도록 해 놓은 사람은 격정적인 사람보다 평온해 보이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에게서 좀처럼 열정의 불꽃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네. 예를 들어 그런 사람은 논쟁을 하더라도 소리를 지르거나 팔을 휘두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의 내면은 뜨겁게 타고 있지!"
_같은 책
'크네히트'가 치르는 그만의, 지극히 사적인 '투쟁'은 거침이 없지만 인용부처럼 '열정의 불꽃'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내비치지 않는다. 아니 밖으로 드러내는 곧 겉치레, 개신교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외식外飾하는 자'의 욕망에서 자유하달지.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처럼 완벽이라 해도 좋은 상태였던 것도 아니다. 그렇게 묘사하지도 않는다(모자란 내 처지에서 위로가 된다면 되는 것인데 그렇다고 이를 의식하고 작정하여 지은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자연스럽다 여기지 못했을 것. 작위로 인한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단언컨대 없다). 그보다 그런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에 집중한다(이는 헤세가 자신의 작품 전반에 심은 특징 아닐지). 공을 들였음이 느껴진다. 마치 활자를 깎고 다듬기를 거듭하는 세공 과정처럼. 무상無常한 제행諸行의 천변만화하는 면면을 말글로 떠서 지면에 앉히는 세심細心. 이렇게 보여주는데 마음이 동動하지 않을 수 없지. 시키지 않아도, 다른 누가 시켜 내딛는 게 아니고 스스로 걸음 내기를, 길 따르기를 택한다. 고수, 고수다. 내면에로 침잠하는 동시에 그 마음을 이웃에 내는 데에 걸림이 없는, 그야말로 화이부동和而不同. 자기를 세우지 않으니 대하는 이들 스스로 마음을 연다. 선악에도 구애되지 않고 자아도 훼방 않는다. 그러니 절로 자리이타自利利他. 억지부리는 바 없으니 모든 게 자연스럽다. 저를, 제 욕망을 내려놓으니 어쩌니 선언도 없이. 그러면서도 종내엔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준다. 아낌이 없는 것, 아끼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면에서의 치열한 담금질을 거치지 않고는 애초에 불가능한 선택. 생존을 역설하는 생명체로서의 욕구를 왜라는 질문으로 몰아붙인다는 게 말처럼 쉬운가, 어디. 입으로야 '본래무일물'을 옮겨도 이의 납득없이는 자기 자신 완전히 내어주긴 어려운 것처럼.
'나의 사랑하는 책 그 책 중에 있'¹다더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²는 찬송이 귓가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은聖恩을 입은 듯, Oh My GOD.
자존自尊을 지탱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과시 않고 조용히 타오르는 그러나 꺼질 줄 모르는 불꽃.
여기서 비롯하는 듯싶다.
이제부터는 내면에 처음부터 자리해있다는 신전,
성소에 들어 그 재단 앞에서 기도해야지.
(마치 배화교도拜火敎徒 같군)
'저렇게 살다 가고 싶어요. 닮은꼴로 살겠습니다.'
붙임:
a. '유리알 유희', '유리알' 낱낱으로는 딱히 쓸모를 찾지 못하겠더니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어떻게 늘어놓느냐, 구성/배치에 따라 비로소 떠오르는 얼개나 형상. 이를 상상하니 이 '유희'야말로, 잠들어 있던 활자가 깨어나 내면의 목소리를 입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겹치니 마치 책읽기, 글쓰기의 은유 같기도 하다.
b. 사소하지만 치열한 '나', 무수한 '나의 투쟁' 만이 이 세계의 비참을 거두고 구원을 당기는 유일한 방편일지 모르겠다.
c. 어디까지나 사견私見임을 밝혀두면서.. 나는 이를 '자기소멸 서사'라고 이해하고 이름한다. '크네히트'는 정점을 향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소실점-되기를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석가모니처럼.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욕망하는 화택火宅, 욕망의 거처로 기능하는 육신을 쉬프트-업 해버렸달지. 그 자체로 불연속점의 전범典이 된 것. 하나의 존재이면서 불연속점에서의 도약을 통해 위상이 달라져버린, 곧 이전/이후의 존재로 갈음되는 것. 이는 마치 개신교에서 이르는 '거듭남'의 현시 같기도 하다. 역시 개신교 성경에 기록된, 실명 상태를 맞닥뜨린 세속의 '사울'과 개안 이후 성역(출세간이라 해도 좋을)에 든 '바울'처럼. 또 계를 파하고 민중 속으로 스민 '원효'스님처럼. 진리에 이르는 첩경이야말로 '좁은 길'이라는 비유를 헤세는 적확하게 이해하여 작품으로 보인 게 아닐까. 와, 소름 돋네 이냥반.
¹ 개신교 찬송 <나의 사랑하는 책>
² 개신교 찬송 <부름 받아 나선 이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