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리단길' 단상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강은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지만, 길은 인간의 것이므로 마을에서 마을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모든 길은 그 위를 가는 자가 주인인 것이어서 이 강가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과 친인척과 이웃은 흔히 상류와 하류 사이의 물과 길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늙은 길은 가街가 아니고 로路도 아니며 삶의 원리로서의 도道이다.

_김훈, 자전거 여행 1권 中


눈길, 손길, 발길, 모두 사람이 내는 길이다. 눈 닿는 데로 걸음 내어 손 마주 잡음으로 해서 사람은, 제 마음이 건너다닐 길을 꾸려낸다. 이렇게 마음 오갈 때에나 길은, 가街나 로路에 머물지 않고 '삶의 원리로서의 도道'로 비로소 자리하게 되는 것. 다시 말하면, 저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경계에 걸리는 바 없이 그 터울 너머 타자/세계(모든 생명과 그 생명 활동을 가능케하는 제반의)로 향하려는 그 각각의 마음으로부터 길은 비롯한다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 이렇게 들어서는 길 위에 맺히는 결실, 그 각각의 마음이 뭉쳐 이루는 바가 곧 '한마음'이겠고. 이를 전제할 때에만 인간은 자연에 개입하며 벌이는 모든 인위를 두고 불가피不可避라 이를 수 있을 것. 이외에는 모두 피할 수 있음[可避]이니, 먼저 언급했던 그 전제를 벗어날 것 같으면 처음부터 하지 않으면 그만.


한편 이처럼 마음 닿는 데로 길을 내고 그 위에 삶을 꾸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굳이 노마드 운운하지 않아도) 소유물에 묻혀 붙박이는 형태를 반기지는 않을성싶다. 자유롭지 못하니 부자연스러울밖에. 그러니 무주처無住處 말고는 다른 도리 없음을, 부대끼는 매 순간마다 느끼게 되지 않을까. 다만 이렇게 느껴 알지만 머뭇대며 망설이는 것뿐. 촘촘하든 느슨하든 관계로 엮인 이 그물망에서 스스로 몸을 빼어 돌이킨다는 어떤 착각─이를테면 대오大悟라는 표현에 붙들려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각성覺醒이라도 있어야만 할 것 같은, 크나큰 사태를 맞닥뜨려야지만 일순 국면 전환이 가능할 것만 같은 데─에 스스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해서 당장 행行하면 그만인 것을 제게 주어지리라 여기는 어느 때/기회를 기다리며 미루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는 사이 계속 맴돌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섬뜩한 진실인지도.


맴도는 것, 달리 이르면 인습이요 관성이겠다. 가시적인 형태에 힘을 쏟으니 소유에 집착하게 되고 붙들려 애를 쓰는 만큼 붙박이게 되는 건 아닌지. 몸을 위하(려)는 욕망에 성찰이란 인위(타자/세계를 향해 마음 내는 것을 전제로 하는)의 개입이 깃들지 않으니 제 몸을 중심으로 외연을 넓히는 데에만, 자신을 구심으로 하는 이권利權의 동심원 그리기에만 몰입하게 됨은 아닌지. '나는, 내 자식은, 내 부모는, 내 친지는, 내가 아는 주변 누군가는' 잘 되었으면 바라고 잘 되어야 한다며 적극 개입하는 식. 이처럼 혈연 등을 주된 줄기로 하여 가지를 뻗치는 서사의 단점이자 맹점이라면 다름 아닌 자가당착일 것이다. 축적과 집적을 일삼는 자본에 대/중/소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자신과는 무관한,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로만 여기는 한편에서 앞서와 같은 생각을 구현하지 못해 안달하는 이상 모두 공범. 무관하지 않다. 깊이 간여하고 있는 상태 임을 자각해야 마땅. 그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문제에 책임을 느끼는 게 당연하단 얘기. 무감각한 스스로를 탓해야 할 것. 제 탓으로 여김이 사무칠 때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표현은 비로소 새로운 실천으로 옮아갈 수 있겠지('이 말[言], 이러한 표현의 안장 위에 이 마음을 올려두자. 태워서 말 달리자. 계속해서 달려야'겠노라 다시 다져본다. 그래, 주마가편走馬加鞭. 바람직한 바를 떠올리며 그 구만리 밖을 향하는 시선 좇아 생각을 거듭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해야지. 독립과 자존은 기울지 않고 바로 살려는 태도를 관철하는 삶을 뒤따르는 이름일 것).




이렇게 보면, 'X리단길' 유행에는 과연 반성 내지 성찰이 깃드는지부터가 의문이다. 당초 그러한 길이 들어서기까진 숱한 고민의 흔적이 켜켜이 쌓이게 마련. 마음이 마음에 닿기까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는, 삶이 건너오는 방편[道]을 고민하지 않고는 그러한 길이 형성될 수 없음인데. 이처럼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가 자리 잡(으려)는 데에 꼭 끼어드니 자본. 목적은 사람이 아니고 그이들이 지닌 돈, 그네들이 쓰는 그 화폐. 이를 제 이익으로 셈하는 데에 혈안인 흐름에 휩쓸린 '인격화된 자본'.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건물주와 결탁한 부동산 업자랄지, 왜냐하면 이들 무리가 담합하여 임차 수수료의 과도한 인상 흐름을 주도하는 편이니. 또 한편에서 국내외 in/ex-terior, facade 등 베껴다 자본을 덕지덕지 바른 모양새로 유입 늘여 권리금 한몫 단단히 챙겨 빠지는, 자영업자를 가장한 철새 자본가 등이 있겠고. 아무튼 이들이 자신이 벌이는 일이 미치는 영향을 제 편에서의 이익으로만 셈하는 데에만 몰입하면 할수록 탁해질밖에.


눈, 손, 발을 구실로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의 질서는 이렇게 화폐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 질서로 빠르게 재편된다. 道를 배제하고서 路에서 街로 확장 통해 투하 자본 이상의 수익 환원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는 흐름이니 인간은 뒷전일밖에. 사람을 우선하는 사람들이 밀려나고 돈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생산성 향상이나 생산 자체의 신장이 목적이든,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성장/발전이든 목적이라면 실은 모두가 함께 누리는 데에 있지 않나. 그런데 이 목적을 거꾸로 세운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뒤집힌 형세를 당연 시 한다. 이건 기이하다. 오래전 마르크스가 이른 것처럼, Commodities-Money-Commodities'곧 상품/재화/서비스 이용 통해 필요 충족 수준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이로움'이라 여기던 수순을 M-C-M'으로 전도시킴으로 해서 곧 누군가의 Money'으로 귀착됨을 당연 시 하는 이 역전(apostorphe의 돈호야말로 소유의 격을 드러냄이니 이 표현 자체가 신기하다. 마치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쓰일까 싶어서).

이렇게 자본 중심으로 재편되는 질서라는 측면에서 보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또한 인클로저enclosure-movement와 동일한 궤로 읽어도 무리는 아닐 터. 문제로 짚는 사람은 많은데 탁류는 좀처럼 맑음을 되찾지 못하니 무엇 때문인가. 언어, 표현, 말이 가리키는 바를 살아내지 못하면 결국 앎을 드러내어 스스로를 치장하는 액세서리로 소비하는 데 그치기 때문 아닌지. 좌우 막론, 이념의 아바타이길 멈추고 결단에 과감하여 그를 기어코 살아내는 이들, 제 운명을 감내하며 묵묵히 살아내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는 한에서 만이 그 총합인 세상도 모습에 변화를 보이게 될 것.


어쩌면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나누어 주었으리라는[천부:天賦] 인권의 자유는, 그러한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리라는 책무의 달란트로 함께 주어진 건 아닐까 싶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존재 간 서로를 살펴 부단히 마음을 내어 길을 드러내는 것만이 생물種 가운데 사고思考하는 인간을 변별하게끔 하는 건 아닐까. 자리이타自利利他, 이타와 자리가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는 실천은 인간 존재만이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짓고 다듬어 꾸리는 모든 길과 道는 따로일 수 없지 않을까.


구도求道와 득도得道는 짝을 이룬다. 사람에 이르는 길을 구함은, 사람을 구하는 길을 얻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을 중심 삼는 동시에 이면으로 구별되는 타자, 이 양면 구성 자본제의 동전을 쥔 '보이지 않는 손' 밖으로 난 길은 이밖에 없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ex-pl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