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mansplain = man + explain, 그러니까 남성群에서 두드러짐을 드러내는 표현. 통계를 근거 삼은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해당 표현을 접하고 먼저는 나부터 뜨금했으니 살아낸 세월을 돌이켜 오늘 다시금 새겨보니 부정할 수만도 없는 자신의 모습을, 기억이 자리한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니 그야말로 난처難處이다;; 그 가운데 섞여들게 마련인 同性의 선배/상사/친구 등등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나로 국한된 경험의 비좁은 영역을 일반화할 수야 없겠지만 그런 한편 이 비좁은 영역만 돌이켜 살펴도 이 지경이면 정말이지 '경향'이라 일러도 과언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데에 또 생각이 미친다.
그나저나 이 '맨스플레인'을 요즘 아이들 입말로 옮기면 '설명충'이겠는데 그렇다면 차라리 men'splain이 적절한 건 아닐까를 잠시 떠올려보았다(경향과는 무관하다 싶은 여성을 포함하자는 게 아니라 남성이라는 인간種을 아우르는 편에서 men-이라 이른 것. 다만 자기 바깥 대상을 지향하는 설명에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편이라면 기실 인간種 전체를 아우르는 게 무리일 수만은 없겠다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요는 ex-plain. 명백[plain]하니 비로소 자기 바깥[ex-]으로 내어도 문제 될 게 없음을 이른 것이라 나름 새겨본다. 고쳐 이르면 저를 경계로 갈리는 게 아닌, 자기 자신에 걸림이 없이 안팎 모두에 동일하게 수용될 수 있을 만큼 명명백백한 것으로 이런 견해에 한해서나 바깥으로 내어도 낼 수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 아닐지. 그러니까 plain이 전제되지 않고는 함부로 바깥 다른 누구에게 내어서는 아니 됨을 먼저 상기하라는 제언으로 받아들여도 좋겠다 싶다.
ex-plain 곧 이 설명說明에는 분명分明이 선행하겠는데, 밖으로 내려는 견해를 먼저 제 안에서 나누어 살피는[分明] 과정이 우선함이 타당하지 않겠냐는 사견에 빗대어 멋대로 새겨보는 것. 솜솜이 뜯어보고 이편 저편을 살피고 살핀 끝에 다다른 뒤에야 겨우 낼 수 있고, 그래야 하지 않겠냐는 것. 동시에 이조차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서, 밖으로 내었을 때 그러한 견해에 따르는 여러 측면에서의 '다른' 시각 또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나 싶은 것. 그러니까 밖으로 내는 견해 자체에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여지餘地가 있을 수 있음을(아니 당연히 있을 것임을!), 처음부터 바탕으로 삼고서 열어젖힌 상태 그대로 내어야 비로소 상호 간 소통疏通을 경험할 수 있겠다 싶다.
이렇게 보면 '맨스플레인'이란 표현을 통해 짚고자 한 문제, 그 소지素地는 '설명' 자체에 있다기보다 설명'하려 드는 태도'에 있지 않나 싶다. 앞서 이른 바와 같은 분명分明이라는 내적 검증(설명하려던 내용이 품게 마련인 오류를 비롯한 등등의 문제는 대개 이 과정에서 수정/보완되며 최소화될 것이므로) 과정 없이 스스로가 뚜렷하게 여기는 바(무지에서 비롯된 오해나 착각임에도)를 그대로 자기 바깥/타자를 향해 내면서 어긋나버린다는 게 아닐지. 검증 신뢰도는, 사견私見을 비교/검토할 별개의 대조군 내지 잣대 등으로 활용 가능한, 객관의 DB 질과 양에 비례하게 마련. 그러니 오류 등을 최소화하려는 만큼, 객관의 DB를 나름 구축하(려)는 데에 그에 상당하는 시간/비용을 들임은 당연(책 읽기는 이 DB 구축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일 것).
맨스플레인이 가리키는 문제는, 이에 게으른 나머지 DB는 열악한 데 반해 자신을 돋보이려는 욕망은 지대한 데서 빚어지는, 그러니까 이 괴리/간극/불균형을 당장에 극복하려는 과욕이 빚는 갖가지 참사(눈물?없이 보기 힘든 안습의 사태랄까)를 이르는 표현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당초 공감共感 또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는 데서 발發하여질 수 있음이니, 유한한 삶을 살면서 모든 사정에 밝을 정도의 경험을 몸소 체험할 수야 없는 것. 따라서 객관의 DB를 구축하려는 나름의 노력, 내면 경작에 힘을 쏟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방편. 허장성세보다는 당장의 빈곤한 내면을 직시하고 오늘에 충실하려는 편이, 그런 오늘을 어제로 계속해서 쌓아갈 때만이, 마침내 괄목刮目하여 상대相對하지 않을 수 없는(다른 누구보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을 그리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전이轉移된 상태의 제 모습을 맞닥뜨릴 수 있게 되는 것. 길고 오랜 노력을 수반하는 이 길만이 첩경捷徑, 이외 별개의 왕도?! 없다, 있을 리가 없지.
이익을 중심으로 저마다 제 편에서의 이해를 타산하는 형태로 재편된 인간관계, 그만큼 인간 상호작용 범위가 협소해졌다면 협소하여진 것인데 이럴수록 소위 그 인간미라든지 정情에 대한 향수에 젖게 마련. 그러나 보이는 일면을 꾸미자고 성찰 빈곤 내지 그 부재에서 비롯하였음이 훤히 드러나는, 하나마나한 말글을 생산하는 한편에서 이를 퍼나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부질없는 중에 그래도 꾸미는 편이 낫다는 여김 또한 그에 쏠리는 사람과의 나눔을 그리(워 하)니 빚어지는 일이겠지만 이 화장化粧이야말로 가상의 소셜이 빚는 중독 증상 아닐지. 좋다 여기는 하나마나 한 말글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퍼나르는 행위로는 중독자에 가까울지언정 처음 의도처럼 좋은/괜찮은 사람과는 오히려 거리가 먼 게 아닐지.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제언, 그이가 말로 가리키고자 한 지대 곧 이 '나'라고 여기는 이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채로(이 상태라면 '심우도/십우도'에서의 '견적見跡'에 해당한다 할 수 있지 않을지) 좀 더 나/자신을 분명分明하게 살펴 세세히 알고자 하는 데로 돌아올밖에는 다른 도리 없지 싶다.
타자 아닌 저를 먼저 살피니 자기 내면에 일었다 사라지길 거듭하는 갖가지 감정 등등을, 계속해서 객관의 DB를 구축/확장해가면서 대조, 살펴 헤아리며 다듬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 이 성찰 과정 곧 숨을 고르듯 또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싶은데 마음에 빗질을 한다면 비유로 적절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결을 감각하고 가지런히 다듬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설명/ex-plain은 비로소 꼴다운 꼴, 모양새를 갖추어 바깥 타자도 수긍 가능한 형태의 진화를 이루게 되는 게 아닐지.
안목이라면, 이처럼 제 마음의 결을 감각한 끝에 불안정한 가운데 처하여 있음으로 해서 흐트러진 마음의 결을 제 이전을 겹치어 가며 읽어내는 힘이겠고.
하여 그 상처傷處 곧 그 상傷의 처소處所에 머물러 있는 이에게 그 미궁을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실마리(아리아드네 마냥)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러고 보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임을 자각한 데에서야 무상無常한 제행諸行 가운데서 義라 여기는 바에 기댄 일면을 고수할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제법諸法이 무아無我 임을 살핀 끝에 자기중심을 벗은 상태에 이르러 자기 자신이라 이를 만한 중심의 덧없음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만인 가운데 오롯한, 法이든 道이든 義이든 무엇이라 이르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바를 보고 느끼니 그리로 돌이켜 거居할 수 있음 아닌지(이것이 자등명 자귀의 법등명 법귀의가 가리키는 바 아닐까). 이렇게 일체중생유불성一切衆生有佛性을 감각하면서 비로소 입전수수入纏垂手의 형편에 가닿게 되는지도 모를 일. 어쩌면 ex-plain은, 먼저 제 속에서 객관의 DB를 바탕으로 성찰을 거듭하는 속에서 명백하다[plain] 여겨지는 바를 밖으로[ex-] 냄이니, 이 방편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입전수수에 갈음하는 행위일지 모르겠다. 이렇게 덧대어 새기니 그 의미 새삼 무겁게 느껴지는군.
한편 확철대오擴徹大悟니 각성覺醒이니 초탈超脫이니 무언가 거창한 존재의 도약이라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 또한 실상은 인간 자신의 근거 없음을, 그러면서도 이 유물唯物의 토대에 사슬로 묶인 바 되어 부자유스러운 존재로, 부조리 가운데 실존하는 존재로, 자신과 다르지 않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타자를 품에 들이는 데서, 자신처럼 여기는 데서 원수마저 사랑하는 실천을 보이는지도, 보일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거창한 존재의 도약이라기보다 그 반대로 사람다운 구실을 겨우 하게 되는 상태 드러내는 표현들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