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국, 위기?
'화폐의 본질' 탐구 기회!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코로나19 팬데믹은 해외 주요 국가들이 통화정책을 재정정책처럼 사용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전시'지만, '이단적 정책'이 우후죽순 채택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국가경제 운영 프레임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 최근의 비정통적 통화 정책이 암시하는 것이 있다. 아직 정부가 국채를 중앙은행에 '직접적으로' 팔아 자금을 마련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유력 중앙은행들이 이미 정부지출이 필요한 회사채 시장 등 광범위한 민간 부문에 유동성을 꽂고 있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간접적으로'나마 매입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로 지금의 예측보다 훨씬 많은 정부지출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재정적자를 통화 발행으로 메우는(monetizing deficits) 게 현실화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인류는 현재 코로나19라는 '외부 침략자'로 인해 국가경제 운용의 기존 '교리'는 물론 '화폐란 무엇인가'부터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혁명적 시기를 경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_이종태 기자 기사, <코로나19가 불러온 사상 초유의 '통화정책'>, 시사IN #655 【새로운 경제의 서막】

옳습니다, 코로나19 시국은 뜻하지 않게 화폐의 본질을 다시 사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지요. 미래를 담보 삼는 '저축'과 '신용'의 바탕은 어디까지나 유비무환의 사회적 계약 안에서 머물러야 마땅합니다. 이 기본을 망각한 채 자본 불리겠다고 덤벼드는 낱낱의 '투기'가 괴리를 심화시켰음을 직시, 이 서사를 갈아엎고 재구축하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썩어 사라지게 마련인 상태를 기본으로 하는 실물 경제와 유리된, 그리고 이를 심화시키는 유동화에 제동 거는 인위적 개입이 필수불가결임을 자각하는 바탕이 될 수 있겠다 싶고요.

실물경제와의 대응을 러프하게 이르면 화폐의 정기적 감가 내지 휘발 형태가 될 것인데 국내에선 이것이 이미 지역화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 한시적 할인 및 적립폭 확대 또는 기간 내 미사용 시 휘발되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를 직접 겪음으로 해서 비로소, 화폐를 '교환' 기능에 국한시키는 인위적 개입이 상시로 전개되어야 마땅하리라는 당위가 사회적 합의를 가능케 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해서 드디어 정책으로 입안되어 펼쳐질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일국 내에서가 아닌 글로벌한 형태로. 이렇게 재구축되는 화폐 서사의 궤도 안에서 보유세 등의 세제 개편 또한 많은 이들의 합리적 사고/판단 아래 절로 이루지 싶고.

당초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습니다. 이건 정말 이상한 체계이지요. 한편에서 불어나는 불로소득, 그 낱낱의 화폐가 지닌 '교환'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 다른 한편에서 24시간을 2/3/4로 쪼개어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시스템이라니(이것이야말로 자본제의 적나라한 실체 아닐지). 그러니 잃을 건 '사슬'이란 말이 뜬구름 같은 말이 아니라 분명한 실체라 여겨집니다. 이제 찾게 되는 건,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시간'이라는 것이 선명해지는 것이고. 최저임금인상/주52시간제 등등 또한 그 근본은 이 궤를 되찾자는 것이겠고, 그래야 마땅할 겁니다. 지금 이 코로나19 시국이야말로 화폐를, 교환 기능 內로 국한시키는 인위적 개입을 재장전할 때일 겁니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사회적 계약 안에서만 '저축'과 '신용'은 추구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아오 씐나 ~ *_*




사람들의 공존being-togetherness은 정치라는 행위를 발생시킨 원인인 동시에 정치의 목적을 규정하는 이익과 가치의 척도이다. 정치 철학의 상식은 사람이 속한 친족과 계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 모두의 공존이 가능한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에 정치 본연의 의의가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말로 표현된 그 통치가 목표로 하는 바는, 그 말이 기록된 『예기』의 「예운禮運」편에 나와 있듯이, 인간 사회의 대동大同 실현, 즉 보편적 공동성의 실현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정치를 조직화하는 인간 능력은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적 연합과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 연합에 대해 대립을 이룬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적 삶은 가정생활의 경제적 필연에 속박되지 않고, 그 필연에서 해방되려는 욕망이 초래하는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세상 속의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를 뜻했다. 공公 영역의 대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가다. 그러나 공과 사는 별개의 사회적 영역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 양자의 구별을 둘러싼 쟁론과 타협이야말로 실은 정치의 업무이다. 현대 정치는 그 주요 과제 중에 공의 영역을 정치적, 경제적 특권 계급의 독단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노력, 그 특권 계급의 사리사욕으로부터 공공의 자원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포함하고 있다. 현대 민주정치의 핵심은 인민대중 공통의 필요와 열망에 근거하여 공공성을 정의하고 구현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 한나 아렌트는 대중민주주의가 공의 고전적 이상에 부합하기는커녕 오히려 배치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 영역이 인공적 사물의 세계라는 정당한 주장을 펼친 『인간의 조건』 중의 한 단락에서 그녀는 그 세계가 민주적이고 유동적인 공통성이 출현하는 장소라는 것을, 흥미롭게도, 테이블의 비유를 들어 밝혔다. "세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본질적 측면에서 보면, 테이블이 그 둘레에 앉은 사람들 사이에 놓이듯이, 사물의 세계가 그 세계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이in-between가 그렇듯이 그 세계는 사람들을 연계시키는 동시에 분리시킨다." (…) 아렌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인간 공통의 비근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공통의 행위로부터 민주적 공동성을 위한 정치적 상상이 성장한다. 이것은 농촌 공동체의 문화적 잔여를 가지고 있는 한국사회의 일각에서는 조금도 기발한 생각이 아니다. (…) 황석영의 「돼지꿈」은 국가주의적, 개발주의적 담론의 전횡에 맞서서 1970년대 문단 일각에서 일어난, 공론 영역을 복수화複數化하려던 시도에 속한다. 그 작품은 정부 통제하의 공론 영역에 접근하지 못했던 종속 사회 집단─공장 노동자, 빈민 여성,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등─이 자신들에 대한 공론적 규정과 해석에 항거해서 자신들의 삶의 실정을 스스로 말하려고 했던, 자신들을 주어화-주체화하려고 했던 움직임의 일부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위자 대항공중subaltern counterpublic의 창출에 관여했다고 간주될 만하다. (…) 자본주의적, 개발주의적 사회 속 (…) 재난으로부터 우리와 우리의 자손을 구제할 의무는 조금도 낡지 않았다. 서로 평등하고 함께 자유로운 사회를 위한 상상은 조금도 낡지 않았다.

 _황종연, <국가재난시대의 민주적 상상력>


혈연을 구심으로 하여 그리는 동심원, 각자도생 식 정저지와. 어차피 뫼비우스 띠 같은 인생사라면, 화폐의 쳇바퀴 이면을 택하는 편이 즐거운 달음질로 지속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



붙임. 1 : Head 삽입, Photo by Jp Valery on Unsplash

붙임. 2 : 황종연, <국가재난시대의 민주적 상상력>은 『눈먼 자들의 국가』에 실려 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때로는 뺄셈 (feat.사회적 거리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