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왜 다님?

교지서강 발행 글

by 네모


대학에 다니는 이유에 대해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참 오랫동안 고민을 했었다. 대학의 기능 상실을 통렬히 비판해 볼까, 대학의 역사를 펼쳐보아야 하나, 고민의 연속이었다. 며칠을 내리 고민하다 밤을 새워 400장짜리 논문을 읽고 난 후에도 결론이 나지 않아서 포기를 했다. 그리고 그냥 솔직한 내 이야기를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공부하는 것이 정말 싫다. 정확히 말하면, 공부 후에 평가받는 것을 정말로 싫어한다. 시험 기간이 되기만 하면 평가를 받기도 전에 긴장한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그럼에도, 대학에 나와 꾸준히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한다. 인문대학, 특히 종교학과에 나와서 ‘이거 배워서 뭐 하지?’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종교학과라고 하면 흔히 목사나 신부/수녀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기독교학과나 신학과의 역할이다. 그러니 종교 부문에서도 취업이 안 되는 종교학과의 지식…. 배워서 뭐 하는가? 사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지식은 어느 정도의 실용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하지만 취업에 도움 되지 않는 지식은 정말 쓸모없을까? 대학에서 왜 실용적인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느끼지? 그런데 취업만을 위해 공부하는 것도 참 고역인데…. 이런 무한 소용돌이에 빠져버린다.


대학이 뭐라고… !



대학의 본질

그러니 학교라는 것의 본질부터 정의해보자. 대학이란 조직의 핵심은 무엇일까?


대학의 핵심역량은 가르치는 교수와 배우는 학생이 서로 일정 기간 만나도록 체계적으로 주선하는 일에서 찾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것이다. (정기오, 『대학이란 무엇인가』, 2006, p. 168). 누군가가 의도적인 계획하에 교육-학습 단계나 분야별로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교사와 다양한 수요를 가진 학습자를 체계적으로 중개하여 교수-학습의 장에서 만나게 해 주는 것이 학교인 것이다. 교육과정과 교수-학습조직을 통해 체계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교사와 학습자를 만나도록 중개하는 것이 학교의 실체이다(정기오, 『대학이란 무엇인가』, 2006, p. 53).


여기서 대학의 본질은 교사와 학생이 만나서 학습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꽤 간단명료하다.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까 대학교의 핵심은 교수와 학생이 학습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다. 교수와 학생이 학습할 수 있도록 학습의 장을 얼마나 잘, 수준 높게 열어주는가가 대학의 본질이다.


2. 대학의 목적


이념적으로 대학은 진리 탐구를 위한 곳이라는 정의가 내려져 있다. 대학에 나온 사람을 ‘지성인’이라고 부르는 말만 봐도 그렇다. 이런 생각은 독일 대학의 이상에서 나왔다. 독일의 관념론적 대학 전통은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1767~1835)의 이상을 반영하였다. 그는 자고로 대학이란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학문과 진리에 봉사하는 기구라고 정의하였다. 고급 전문 직종 양성을 중심으로 공공부문에 필요한 인재 양성소가 대학이란 것이다. 후에 발전한 미국식 대학은 고등교육의 대중화와 산업 발전을 위한 민간 전문 인력 공급에 초점을 맞춘다. 20세기의 이후의 보편적인 대학 모델이다. 즉, 미국 대학은 공공과 민간을 총괄하여 사회적 진보와 발전의 거점으로 여겨졌었다.

여기서 살펴볼 점은 대학은 어느 정도의 직업 교육을 위한 시설이란 점이다. 그 직업의 주체가 공공성을 지닌 직업인지, 민간을 위한 직업인지 정도가 차이점이다. 따라서 대학의 원형은 직업을 위한 전문교육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점이 하나 있다. 유럽의 교육체제에서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교육이 고등학교 과정을 통해 완성되고, 대학 입학 이후는 전문교육으로 진입한다는 점이다. 대학의 입학 조건이 단순 노동과 인습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 성취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인 것이다. 예시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라는 대학입학자격시험은 대학의 전문교육을 받기 전 선결 조건으로 ‘자유인’의 자격을 입학 조건으로 요구한다.


3. 특수한 한국 대학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사학으로 대부분 대학이 출발하였다. 민간 부문에서 활동할 인재를 기르기 위해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미국 대학과 유사한 제도를 받아들여 설립되었다. 하지만 대학의 실행을 명시하고 있는 ‘고등교육법’을 살펴보자.


제28조(목적) 대학은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국가와 인류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심오한 학술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47조(목적) 전문대학은 사회 각 분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이론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재능을 연마하여 국가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전문직업인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가 말하는 ‘대학’은 ‘전문대학’과는 차별점이 있다. 여기서 정의하는 대학은 직업교육이 아니라 ‘심오한 학술론과 그 응용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즉, 한국의 대학은 공공부문의 인재를 양성하고, 정부와 독립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독일 대학의 이념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민간 부문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연구하며 취업을 위해야 한다는 미국식 생각과 제도도 같이 가져왔다. 즉 우리나라 대학의 목적은 민간부문 인재를 기여하기 위함인데, 고등교육법에서는 공공부문 인재를 위함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니까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브랜드가 다른 느낌이다. 호환이 어느 정도 되긴 하는데, 실제로 잘 작동되진 않는 그런 것. ‘자아실현은 대학 가서!’라는 외침과 함께, 진짜로 대학에 와서 자아실현을 하면 다들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너, 취업은 안 해?’라는 말과 함께….


서강대는 어떨까?


서강대학교 홈페이지에 있는 서강대의 건학이념이다.


서강대학교는 학문을 탐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정의를 실천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랑과 믿음을 갖춘 전인교육을 지향한다. 이를 통하여 인류 문화와 인류 공동체의 발전에 헌신할 수 있는 참 인재를 양성한다.


서강대의 교육 이념도 비슷한 말을 한다. ‘서강대학교는 학문의 질적 탁월성을 추구해 온 전통을 이어 학문적 우수성과 창의력을 갖춘 지성인을 양성한다.’ 서강대학교의 대학 요람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교육 목적에는 취업과 관련한 말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캠퍼스 앞에 있는 플랜카드 밑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선배들의 사진이 붙어있다. 취업 지원팀에서는 유지 취업률 1위 탈환 문자가 온다. 대학에서 취업의 문제는 간과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학문과 취업이라는 두 가지 이념의 충돌이 조금씩 보인다. 결국 지성인이 되고자 대학에 왔는데, 취업 교육을 받는 학생에게도, 취업이 하고 싶어서 대학에 온 학생에게도 답답한 일이다.

인문대를 예시로 들어보자면, 작년 인문대학에서는 인문대가 1전공인 인문대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앞서 설명한 프랑스 입학시험 바칼로레아를 벤치마킹한 대회를 열었다. ‘현행 교육시스템 하에서는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인문대학 학생들의 창의력과 사고력을 발굴하고자 함’이라는 명목하에 논제가 주어졌다. 프랑스 대학의 입학시험을 이미 대학에 들어온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열었다는 점이 나에겐 조금 신기했었다. 바꿔서 생각해 보면 프랑스 대학에서 생활기록부 공모전/ 수능 성적 대회가 열린 느낌이려나? 그러니까, 서강대에 재학 중인 학생들도 서강대에서 창의성을 갖춘 인재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현행 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 내가 느낀 묘한 답답함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느낀 그 답답함은 한국의 교육과정과 대학 과정의 괴리에 있다. 취업과 전인격적 교육 모두를 대학 내에서 한 번에 해야 하는 시스템에 의해서. 대학 4년 동안 자기 자신을 찾고, ‘자유인’이 되어도, 취업에 실패해서 대학의 실패자가 된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른 채로 대기업에 취업해도 자아실현을 놓친 실패자가 된다. 묘한 게임이다.


나는 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나


한탄하려고 대학에 관한 글을 작성하진 않았다는 생각이 번뜩 든다. 그럼에도 대학이 중요한 이유는, 대학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법적으로 대학은 시설로 정의되어 있다. 하지만 사립 대학은 사적 자치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 대학은 공동체다


대학본부의 기능은 자치정부의 기능과 유사하다. 즉 자치정부들이 시민의 자유로운 활동에 기인한 소득으로부터 세금을 걷어 도시민 전체를 위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더 나아가 시민들의 대외적 활동 - 이를테면 무역과 같은 것을 적극 지원하듯이 대학본부당국도 대학의 구성단위로부터 세금(overhead)을 걷어 대학 내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학구성단위들의 대외활동-이를테면 산학협동과 같은 것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다.(정기오, 『대학이란 무엇인가』, 2006, p. 59)

정말 말 그대로 대학은 작은 사회이자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등록금은, 단순한 학원비가 아닌 셈이다. 교내 무료 상담 서비스나 취업지원팀의 강연, 스터디 보조금이나 도서관 이용과 같은 시설이 가능한 이유는 대학과 학생이 국가와 국민으로 기능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2.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


지식은 사회에 당면한 문제 해결과 동시에 권위 형성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지식은 기존 기득권 권력의 합리화 역할 뿐만 아니라 기존 권력 체제를 뒤집기 위한 새로운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도 쓰일 수 있다. 따라서 권력의 합리화 기능을 하는 지식은 특정 이론과 권력의 이념을 만든다. 또한 당연하고 옳다고 받아들이게끔 합리화하는 것이 지식의 역할이다. 1000년이 넘도록 대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또한 사회에 일어나는 진보적인 논제를 함께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여러 사회 운동을 주도하고, 그 사회적 현상의 근거를 설명하였다. 한마디로 오랫동안 사회에 존재해 온 대학의 당위에는 이처럼 사회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참여하는 일에 있다.

그러니까 대학에서 왜 연대를 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공동체라고 하는지, 왜 정치 참여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라면, 그건 대학은 실제로 공동체라서 그렇다. 이런 활동에 대학의 존재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3. 내가 경험한 대학


내가 경험한 대학도 취업과 학문이라는 이질적인 두 문화가 섞여 있었다. 해당 분야를 연구한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양질의 지식을 공부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취업의 정반대에 있는 학과에서 나오는 씁쓸한 패배감도 함께 경험했던 것 같다.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 없었던 교양과목의 학점이 잘 나와서 좋아한 경험도 대학에 대한 회의감을 키웠다. 부끄럽게도 지금 내 안에도 두 가지 생각이 함께 공존한다. 서강대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전인격적 성장, 나도 시켜줘!’와 그저 조금 덜 배워도 스펙이나 쌓아서 좋은 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엉켰다.

대학은 공동체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2년간 대학이라는 사회에 별로 참여하지 못했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어도, 막상 내가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주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탓이다. 삶의 면역력이 참 취약한 대학생이다. 대학에 참여한다는 일은 매번 추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이런 문제의식을 나눌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연대하자고 외치는 교지에 들어온 탓에 ‘아, 이런 대학생도 있구나’ 싶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그 추상적인 마음만은 잘 간직하고 있자는 생각이다. 바쁘다 바빠 대학 생활에서 내 삶 챙기기도 벅차지만, 타인의 삶에 관심 갖지 못했다는 미안함만은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내가 경험한 대학은 이랬다. 각자의 답과 삶이 있을 테니 확고한 언어로 말하는 일은 참 힘이 든다. 그럼에도 몇 자 적어 보자면 각자의 속도대로 잘 살아갈 테니 타인과 함께한다는 방향성만 잃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돌고 돌아 다시 : 대학에 다니는 이유

그래서, 나는 대학 왜 다닐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직도 시험 기간이 되면 손이 떨리고, 공부는 어렵다. 취업을 어떻게 할지 슬슬 생각하고 있고, 방학 동안 공모전이나 대외 활동 하나 하지 않은 내가 싫어지는 요즘이다. 그래도, 사람이 좋아서 학교에 나갈 예정이다. 인간에 대해 몇십 년간 어렵게 분석해 놓은 인문학이 꽤나 귀엽게 느껴지고, 타인은 지옥이라면서도 타인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교지도 꽤나 깜찍하다. 그래서 대학에 다닌다. 어떤 일을 하는 데 그렇게 거창한 원동력이 필요하진 않다는 생각이다.

이런 소소한 이유로 대학에 다닌다는 것을, 대학에 오려고 하루 4시간씩만 자며 공부했던 고등학교 때의 내가 보면 기함을 토할 일이지만 말이다. 그랬던 시절의 내가 꽤나 불행했던 까닭일까. 대학을 크고 위대한 무언가로 생각할수록 나는 작아지는 것 같다. 무한경쟁의 시대 온전한 자의로 대학에 오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왕 대학에 왔으니, 대학에 다니는 이유 한 개 정도는 스스로 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나도 조금은 삶에 면역력이 있는 청년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긴 해도 지금의 결론이 마음에 든다. 인문학이 재미있어서 학교에 다니고, 사람이 좋아서 등교한다. 각자의 정답이 있을 텐데, 다들 자기만의 소소한 이유로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나는 대학에서 나의 역할을 못생긴 바나나 정도로 정의했다. 무슨 말이냐면, 몇 년 전 바나나 멸종설이 돌던 때가 있었다. 이는 파나마병이라는 바나나에 생기는 전염병 때문인데 이 곰팡이균으로 인해서 전세계적으로 바나나 멸종위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유는 바나나 산업에서 재배하기 편리하고 맛있는 ‘그로 미셸’이라는 단일 품종을 재배했기 때문이었다. 바나나 생산체계의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해서 질병에 취약한 탓이다. 그러니까, 획일화된 지식 생산체계에 학문적 다양성,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위해서 인기 없는 종교학과 같은 소수과(못난 바나나 같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비슷하게도 나와 다른 이념, 환경, 생각, 지위, 역할을 가진 모든 사람은 생존 공동체이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