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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 Nov 21. 2023

나는 지문조차 흐릿한 사람입니다

-민원서류 떼러 갔다가 흐릿한 지문때문에 수십차례 엄지를 들이대던 순간에

오늘은 서류 뗄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뚜벅뚜벅 읍사무소를 향해 길을 나섰다. 집에서부터 도보 기준 거리로는 1km정도 된다. 일일 만보 걷기에 필요한 나의 걸음수를 채워 줄 거리라서 뿌듯한 마음으로 힘차게 걸었다. 늦가을의 시골 내음과 기분 좋은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며.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오늘도 나의 손가락은 디지털 기계에서 얼마나 오류를 낼 것인가.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심란해졌다. 


난 학창시절 난생처음 신분증을 만들던 순간부터 동사무소-지금의 주민센터-직원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지문이 왜 이리 약하냐? 나이도 어린데 소녀가장도 아닌데 손에 지문이 닳았느냐?"류의 말들. 당시에는 지금의 디지털 주민등록 시스템이 아닌 엄지 손가락에 까만 잉크를 발라 두꺼운 종이재질의 종이 뒷면에 지문을 찍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한 신청절차를 밟던 때였다. 


나는 손발 다한증 환자다.

지금은 성적 순위를 가리는 수험생활을 탈출해서 좀 완화된 듯하다. 늘 젖은 시험지는 울기 십상이고, OMR카드에 땀 얼룩이 번질까 허벅지에 수시로 양손의 땀을 닦아야 했다. 문제풀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땀 닦느라 시간을 뺏기던 숱한 나날들...


그런데 디지털시스템으로 지문확인을 하는 요즘에도 지문오류는 피해갈 수 없다. 오늘도 신분증과 함께 지문을 찍으라는 담당 주무관의 지시에 따라 지문을 찍는데도 역시...세 번만에 겨우 성공했다. 그리고 무인발급기에서만 발급받아야 하는 서류를 발급받는 데 연속 오류로 수십번을 다시 찍어야 해서 수십분을 허비했다. 힘겹게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순간 지문때문에 곤란을 겪었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때는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된 시점이라 아이도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장기 해외출장을 떠났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회사가 일정 비용을 부담하는 혜택을 누리려 비자를 신청하러 갔었는데 나의 지문이 또 말썽이었다. 신원확인을 위해 지문 감식 기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지문을 찍었는데 계속 오류가 발생한 것이었다. 거의 열 손가락을 다 찍은 나는 결국 사무실로 불려갔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지문이 흐렸다는 설명부터 다한증이 있어서 그렇다는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았다. 겨우 직원들을 납득시키고 나서야 무사히 사무실을 나섰다. 비자 신청도 받아주었고. 아마 범죄경력 조회 등 뭔가 내부적으로 조회를 했으리라. 


오늘 수십차례 손가락 지문을 찍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과연 내게 있어 흐릿한 것이 비단 지문뿐일까. 흐릿한 지문만큼 나의 인생도 흐릿한 세월인 것 같다. 지독했던 가난은 지금 보면 흐릿했을뿐인 희망을 좇도록 했다. 그 당시에 지금의 나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면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노력도 안했을 텐데... 노력이라는 말로 점철되었던 날들.

그러나 최근에 만났던 자기계발서들에 따르면 내가 해왔던 것들은 노력이 아니고 그냥 노력이고 싶은 흉내짓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흐릿한 지문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지문만큼이나 흐릿한 내 인생의 날들을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새벽 기상을 하기로 했으면 해야 한다. 하루쯤 날밤을 새는 수고를 기꺼이 해서라도. 약속된 시간에 글을 쓰기로 했으면 어떻게든 써내야 한다. 한 줄이라도. 책을 내기로 했으면 초고를 써야 한다. 아무리 수차례 까인 원고여도 다듬고 다듬고 또 다듬어야 한다. 


백조의 우아한 물 위의 자태와는 달리 수면 아래에서 쉼 없이 하는 물질처럼, 내 인생에 한번은 힘찬 비상을 위한 "진짜 노력"을 해보자. 흉내짓이 아닌 내 본연의 날갯짓으로. 다시 한번! 온 마음으로, 치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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