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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Dec 11. 2020

사치스러운 구금 생활, 기차 여행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의 산문집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에 기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글을 쓰기 위해 기차를 탄 것을 “사치스러운 구금”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 앉아 있고, 기차는 움직인다. 적어도 두 정거장 사이를 달릴 때는 탈출할 수 없고, 또 기차는 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정거장에 도착하므로 내리기에는 항상 너무 늦다. 

하지만 이건 사치스러운 구금 생활이다. 이곳은 안락하다. 글쓰기를 중단하고 그냥 앉아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풍경에 특별히 신경 쓰는 일 없이-이 수감 상태를 사랑하게 되고,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구금 생활이 떠오른다. "    



유럽 여행은 기차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도시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면 기차를 한 번 이상은 타기 마련이다. 내 첫 유럽 여행이 기차를 타고 헤매는 여행이어서 그런지 기차역에 들어서면 공항에 있을 때처럼 설렌다. 두 발이 땅 위에서 약간 떨어져 떠다니는 것 같다. 기차역 안내방송을 하는 여자의 독특한 억양을 들으면, 마법의 봉이 내 어깨에 내려와 이제 나는 낯선 곳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마법에 걸리게 된다.      


조급증이 있어서 늘 기차 시간보다 일찍 나가서 혼잡한 플랫폼을 쭈욱 한 번 둘러보고 왔다 갔다 한다. 역사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지만 늘 번잡해서 생생하다. 어딘가로 떠나려는 이들과 어딘가에서 도착한 이들이 바쁘게 오고 가며 스치는 곳이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면 익명의 여행객들을 토해낸다. 곧 기차 객실은 텅 비게 되고 새로운 익명의 여행객들이 그 자리를 메꾼다.      



샌드위치나 맥주를 사서 탈 때도 있다. 역사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들은 특별히 맛있지 않지만 아주 맛없지도 않다. 그 도시의 맥주를 맛보는 즐거움 또한 크다. 게다가 아침부터 맥주를 마셔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지 않는 자유가 있다. 맥주 한 캔은 두세 시간 거리의 기차 여행을 할 때 좋은 친구가 된다. 한 번은 바르셀로나에서 세비야로 갈 때 1등석 기차를 탔다. 아침으로 (기)차내식이 나와서 어리둥절했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기차를 탔지만 1등석도 처음이었고 차내식도 처음이었다. 5시간짜리 기차 여행이 갑자기 풍요롭게 느껴졌다. 1등석인 줄 모르고 예매했다가 횡재한 기분이었다. 페터 빅셀의 말대로 “사치스러운 구금 생활”이었다.      


천천히 출발하는 기차 안에서 밖을 보며 어디에 내가 있는지 가늠해 보기도 한다. 목적지가 종착역이 아닐 때, 밤 기차를 탔을 때, 도착할 때까지 살짝 긴장하곤 한다. 기차에서 내려도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기차에서 내려서 바쁘게 어딘가로 흩어지는 사람들 무리에 합류한다. 내게는 예약한 호텔 주소가 있다. 내 등을 눕힐 침대가 기다리는 호텔 방을 향해 씩씩하게 걷는다. 그 방 역시 처음이라 낯설지만 말이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탈 때 집중력이 필요하다. 낯선 도시의 교통 체계 역시 낯설어서 조금만 주의 집중을 놓쳐도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에 있기 쉽기 때문이다. 나중에 떠올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현장에 있을 때는 가장 중요한 긴장 상태이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눈을 크게 뜨고 이국의 언어를 읽어내려고 애쓴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언어를 모르더라도 그 나라나 도시의 기호체계에 대한 질서를 조금 습득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보통 이틀에서 삼일 정도 걸린다. 표지판을 대충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완전히 미지의 세계에 있던 도시는 서서히 그 베일을 벗는다.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 있는 간이역에 기차가 정차하면 내리고 싶은 충동이 있다. 장기 여행을 할 때는 충동을 실행하곤 했다. 어딘지 이름 모를 동네에 내려서 한 바퀴 돌고 다음 기차를 타곤 했다. 즉흥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기차가 서면 그냥 내리면 된다. 영화 <비포 선셋>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기차에서 처음 만나 대화를 못 하게 되는 게 아쉬워서 비엔나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기차에서 내린 것처럼. 


     

하지만 이제 즉흥적 선택은 일종의 모험이라 망설인다. 아무것도 몰랐던 이십 대만이 가질 수 있는 배짱은 이제 내 몫이 아닌 것처럼 멀리 있다. 미리 왕복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해서, 중간에 이런 시간이 끼어들면 대혼란이 닥치기 때문이다. 준비 없이 좌충우돌했던 청년기와 달리 일정한 휴가에 떠났다가 정해진 시간에 돌아와야 하는 신세이다. 철이 들고 내 삶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어느 정도 틀에 잡힌 계획 내에서 행동 반경을 결정한다. 예측하지 못한 즉흥성이 매력을 넘어 매혹으로 다가오는 것은 손에 쥔 것들을 놓기 쉽지 않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별일 없는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충동을 억제한다. '너 자신이 되어라'는 진부한 말이 어느 순간에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철학적 말이 된다. 


말 그대로 "사치스러운 구금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여행에 대한 내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는 한 가능할 거라는 희망을 접어 주머니 한귀퉁이에 넣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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