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는 모슬포항 옆 운진항에서 배 타고 10분 정도만 가면 닿는다. 청보리밭이 유명한 자그마한 섬이다. 천천히 걸어서 2시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집도 나지막하고 시야를 막는 것이 없어 평면도를 걷는 것 같았다.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벽화가 있는 가파도 마을길'이 마중한다. 마을길로 가로지르면 동네 한 바퀴 도는데 20분도 채 안 걸릴 거 같다. 곳곳이 예쁘다. 돌담벽도 예쁘고, 돌담에 전복 껍데기와 소라 껍데기로 장식한 것도 예쁘다.
하나밖에 없는 편의점이라는 안내글이 적혀있는 곳이다. 공장에서 만든 인공물이 아니라 자연에서 나온 것들로 장식한 담은 시선을 강탈한다. 그러고는 바닷가를 따라 걷는데 바람이 제법 세서 파도가 달려와서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부서지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만큼 마찰도 커서 파도는 크게 부서지면서 눈부신 물방울을 튀기곤 했다. 추위도 잊고 한참 동안 구경했다. 내가 파도가 부서지는 걸 구경하는 동안 친구는 올레길을 걸으면서 쓰레기를 줍는 클린 올레를 실천 중이다. 차가운 바람 맞으며 맨손으로 줍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내 이기적인 모습이 비교가 되었다. 나도 클린 올레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 한 몸 건사하는데 집중하느라... 흑.
2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는 금세 가득 찼다. 파도에 밀려온 색색의 페트병들이 바위 위에 널려있었다. 둘이서 숙소에서 매일 만들어내는 쓰레기도 엄청났다. 물병, 마스크 포장재, 휴지는 기본이고 이따금 맥주캔, 과자 봉지 등등. 방에 놓인 쓰레기통이 매일 가득 찼다. 사람이 겨우 하루 사는데 만드는 쓰레기 양은 엄청나다. 코로나와 제주도에 내린 폭설은 결국 우리 인간이 만든 기후 변화 탓인데...
쓰레기를 안 만들려면 적게 사고 적게 쓰는 수밖에 없는걸 알면서 잘 안된다. 적게 소비하는 것은 생태주의로 들어가는 첫걸음이고,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은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편하고 익숙한 대로 몸이 먼저 움직이곤 한다. 친구의 클린 올레 실천에 무한 존경을 보낸다.
소망을 적은 띠가 바람에 쓸려 너덜너덜해졌다. 사람들의 소망은 이루어졌을까. 사람들은 소망을 적고 이 머나먼 외딴섬에 묶어놓고 희망을 가지고 섬을 나갔을 것이다. 띠에 적은 소망이 진짜로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소망을 비는 의식에서 희망을 품는다. 희망을 품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소망 전망대에서 산방산, 송악산을 바라보았지만 나는 소망을 빌지 않았다. 해가 거듭될수록 빌고 싶은 소망이 없다. 소망을 빈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닌 걸 알아서 그런가, 아님 원래 비관주의자여서 그런가, 모르겠다. 소망은 부지런함이 이루어준다고 믿는다.
봄이면 청보리가 자라서 푸른 물결이 칠 곳이다. 따뜻한 곳에서는 청보리 싹이 땅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청보리가 없어도 이렇게 너른 평지가 바다랑 이어져있어서 가슴이 뻥 뚫렸다. 서울에서는 빈 공간 없이 빼곡하게 사람의 편의를 위한 건물들로 가득해서 답답한 줄 모르고 익숙해있다. 이런 빈터(실은 청보리밭이지만)를 보면 그동안 얼마나 답답한 곳에서 살고 있는지 깨닫는다. 제철이 아니라 비어있는 것 같은 너른 밭을 보면서 여백의 미를 느끼는 것이 겨울 가파도 여행이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아름다움이 기억 속에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고, 문 연 식당도 찾기 힘든 곳에서 주민이 살아가는 흔적을 애써 찾으며 골목을 누볐다. 보통의 말대로 가파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려고...
카페인데 역시나 문을 닫았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문장을 카페 골목 벽에서 만났다.
모든 것의 시작은 표현입니다.
"은경아, 너 사랑해!" 고백하세요.
말이 꽃으로 피어납니다.
표현된 말은 꽃으로 피어난다.
말의 꽃. 말에 대한 부정적 개념만 잔뜩 지니고 있는데 말을 예쁘게 사용하면 꽃이 된다. 꽃이 되는 말을 해야지, 다짐하고 골목을 기웃거렸다.
가파도에서 나와서 마지막 날이라 아쉬워서 모슬봉, 용머리 해안을 산책했다. 하늘이 흐려서 지는 해를 볼 수 없었지만 날이 어두워졌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해는 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고, 우리는 오랜 경험으로 어두워지면 해가 졌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람도 없고, 해도 지고, 매표소 영업도 종료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위해 모든 것이 수렴되었다. 쓸쓸함에 기습 공격당하는 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