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감각으로의 초대, 소백산

2021. 1. 20. 수

by 김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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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소백산에 다섯 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소백산은 내 '최애'산이다. 정상 비로봉까지 일관되게 오르막이지만 무서운 구간은 하나도 없는 대표적인 흙산이다. 특히 어의곡탐방소에서 올라 왕복하는 길은 12km가 조금 안 되는 쉬운 길이다. 소백산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폐활량이다. 비로봉 가기 전에 평원이 펼쳐질 때까지는 계속 오르막인데 계단 오르기만 연습해도 폐활량은 길러진다. 지구력 이외에 다른 기술(?)은 별로 필요 없고, 정상에 올랐을 때 평원이 펼쳐진 풍경에 반해 철쭉 입은 소백산을 또 보러 갈 것이다.



평원이 펼쳐지는 이유는 바람이 거세서 나무가 살지 않기 때문이다. 칼바람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행운인지, 칼바람은 한 번도 못 만났다. 대신에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었다. 겨울인데도 말이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에는 나무가 우거져서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온다. 그래서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다. 정상에 오르니 햇빛이 평원을 그대로 비추고 있어서 봄날 같았다. 겨울에도 태양의 세기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햇볕이 드는 곳은 눈이 다 녹아 없어지고 햇볕이 덜 비추는 곳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한 장소에서 햇빛 양의 불균형을 보고 햇볕의 힘을 가늠했다.



어린 시절 읽었던 태양과 바람이 사람의 마음을 열고 닫게 하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따스함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무기이다. 바람의 거칠고 강력한 힘은 사람의 마음을 꼭꼭 닫게 단속하는 이야기는 어른이 되면 새록새록 다가오는 교훈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 너무 클리셰 하지만 클리셰가 되기까지는 집단의식과 지혜가 들어있다.



눈이 쌓인 등산로를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 위를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걸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두 다리의 감각이 직접 겪어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 예찬>을 썼다. 제목에서 선명히 알 수 있듯이 걷기를 예찬하는 에세이다. 이 책에서 브르통은 걷는 사람이 철 따라 냄새, 광선, 나무, 꽃, 흐르는 물의 수위, 온도의 주기를 접하면서 세계와 맺는 관계의 톤이 변한다고 말한다. 기상 이변이나 눈, 살얼음, 우박, 비, 낙엽 혹은 진창을 걷는 것은 전에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감각을 일깨우거나 같은 분위기에서 경험했던 다른 순간의 내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고.



겨울 소백산은 새로운 감각으로의 초대였다. 등산로 초입에 있는 계곡물은 얼었고, 나뭇가지 위에는 눈이 소복이 앉아서 목화 송이 같았다. 나무들이 생기를 갖는 계절에는 나뭇가지들이 무성해서 계곡의 생김새 전체를 볼 수 없다. 푸르름이 빠진 겨울에는 나무의 생기 대신 나무가 터를 잡고 있는 계곡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다. 이런 거 보면 사람과 비슷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관계를 맺는다. 관계를 맺는 대상에 따라 우리는 알맞은 페르소나를 사용한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어도 다른 조직이나 관계에서 보면 다른 사람 같아 보인다. 같은 곳도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다르듯이, 사람은 환경에 따라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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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은 눈길이었다. 눈길에서 안전장치인 아이젠을 착용하고 걷는다. 올해 두 번 아이젠을 신었다. 아이젠을 신으면 두 발이 무겁고, 감각도 둔해지지만 심리적 안정감이 생긴다. 발을 내딛여도 안 미끄러질 것이라는 확신이 서면, 금세 적응되어 눈길 위를 자신 있게 걷게 된다.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눈이 많이 쌓여서 발을 내디딜 때 다리를 평소보다 높이 올려야 했다. 그냥 걸을 때보다 에너지가 훨씬 더 필요했지만 이 상황이 곧 끝나고 정상에 이를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을 수 있다. 희망은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희망이 고문하기도 하지만 이건 앞이 안 보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지나친 낙관을 가질 경우이다. 아무튼 고도가 높아질수록 다리는 무거웠지만 태양은 거짓말 조금 보태면 이글거렸다.



겨울산의 매력을 나무에 내린 서리가 눈처럼 보이는 상고대와 눈꽃으로 꼽는다. 태양의 힘을 느끼고 나니, 상고대를 보려면 몸을 극한의 날씨 상황에 노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에서 발산하는 약간의 땀방울과 날숨에 섞여 나오는 작은 침방울도 바로 얼어버리는 온도에서나 상고대가 핀다. 왜 사람들이 상고대를 보면 즐거워하는지 알았다. 상고대는 극한의 날씨에서 몸을 혹사시킨 후 받는 희망이자 보상이었다. 나는 상고대를 못 본 것에 감사했다. 편안하게 산행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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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정상에서 만난 햇빛만큼 따뜻한 일이 있었다. 걷기 친구들은 나와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과 결이 많이 다르다. 사고형인 내가 만난 걷기 친구들은 거의 감정형들이다. 모두 베풀기를 좋아하고, 다정하다. 처음에는 이 성향이 낯설어서 관찰하고 관망하고 분석했다. 지금은 감정형들의 태도를 학습 중이고 사회화도 많이 되었다. 내 감정대로 말하기 전에 상대의 감정을 먼저 배려해서 말하고(쉽진 않다), 상대를 기쁘게 하는 일이 뭔지 보고 배운다. 함께 간 일행 중 한 친구가 생일이었다. 두 친구가 생일 음식을 준비해왔다. 덕분에 산에서 미역국과 전을 도시락으로 먹었고, 꽃다발도 받아왔다. 내 생일이 아니지만 생일인 친구 덕분에 나도 생일상을 받은 것 같았다.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따뜻함을 전염시킨다. 기브 앤 테이크를 전제로 하지 않고,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니, 그것도 세상 물정 다 아는 중년 이후에. 새로운 세계를 만나서 나는 현재 두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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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덤한 식탁 위를 밝게 비추는 꽃다발과 생일이었던 친구가 만들어준 달력. 한창 바빠서 정신없을 때, 친구는 달력을 만들 사진을 달라고 요청했다. 1월 사진에 지난 6월에 다녀왔던 푸르른 소백산을 넣고, 여름인 7,8월에 겨울 트레킹 사진을 넣었다. 겨울에 푸르름을, 여름에 겨울 풍경 사진을 넣어 나만의 달력에 작고 소심한 반란을 일으켰다. 달력을 받고 엔도르핀이 대방출되었다. 내 친구들에게도 엔도르핀을 나눠주려고 나도 달력을 제작했지만 아직 못 만나서 내가 다 가지고 있다. 어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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