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소백산

2020. 5. 30. 토

by 김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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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다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곁에 있는 친밀한 사람을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누군가가 나에게 보여준 모습의 일부만을 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산도 마찬가지다. 한두 번 다녀와서 그 산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경솔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한 번 가보고 다 안다는 오류에 자신을 가두는 사람일 터이다.


우리가 어떤 산에 대해 안다고 가정하는 일은 산의 무수한 모습 중 지극히 단편, 즉 산에 올랐던 그 날의 모습만을 아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산도 진입로와 하산 지점이 하나인 산은 거의 없다. 따라서 어떤 등산 코스를 택하는지에 따라 산의 모습, 수종과 식물의 분포는 다르다. 같은 등산 코스여도 계절과 날씨에 따라, 함께 등반한 사람들에 따라 산은 엄청나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에 슬금슬금 다니다 보니 소백산에 두 번째로 가는 기염(?)을 토했다. 2월에 어의곡 탐방소에서 시작해서 칼바람으로 이름을 떨치는 비로봉에 오른 후 천동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다녀왔다. 비로봉에 오르면 눈앞에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능선이 펼쳐진 전경을 잊을 수 없어서 푸를 때 한 번 더 가보고 싶었다. 광활한 능선이 초록으로 뒤덮이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만 해도 엔도르핀이 대방출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 소백산행은 청량리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희방사역에서 내려 죽령 탐방소에서 시작해서 제2연화봉과 소백산 천문대를 거쳐 연화봉을 찍고 희방사 쪽으로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이제 소백산 일정을 짠다면 희방사 탐방소에서 시작해서 연화봉을 찍고 비로봉으로 올라 비로봉으로 내려오거나 하산 지점을 천동계곡이나 다른 곳으로 잡는 게 소백산의 아름다움을 두루두루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쓰니까 나님이 꼭 소백산 덕후인 산악인 같다.


죽령에서 제2 연화봉까지는 대략 30-45도 각도로 이루어진 오르막 지옥이다. 길은 천문대까지 이어져서 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라 만만하지만 경사도 때문에 호흡은 거칠어지고, RPM이 미친 듯이 치솟게 만드는 코스이다. 포장도로여서 소백산 전경을 전혀 볼 수 없어서 살짝 아쉬운 길이지만 난이도는 무척 낮은 길이다. 하지만 실망은 금물. 확고한 일관성으로 30-45도로 된 오르막 지옥이 끝나면 하늘과 맞닿은 풍경이 펼쳐진다. 두구두구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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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소백산의 매력은 정상에 오르면 길고 넓게 펼쳐지는 능선이다. 봉우리에 오르면 완만한 능선을 따라가면 된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쓰면 딱 좋은 나무들이 한쪽에 버티고 있다. 이 사진만 보면 오르막 지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친구는 길을 따라서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살아가는 모습 같다며, 므흣한 시선으로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소실점으로 이어진 길이 뭉게구름을 이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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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구름 바로 아래 여러 가지 연둣빛 농담을 만들어내는 것의 실체는 구름 그림자. 보들보들한 신록에 눈이 시린다. 하루 종일 보고 오면 마음이 넓어지고 착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야 방해 없이 뻥 뚫린 산세를 바라보는 쾌감에 중독되면 산을 더 자주 찾게 될 것이다. 사진으로 보면 다 비슷해 보이지만 봉우리마다 산세가 달라서 어떻게 해서든 차이를 담아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지만 역시 카메라는 사람의 눈을 따라올 수 없다. 소백산은 내 홍채를 통해 들어온다. 요즘 성능이 의심되는 내 망막에 전해지고, 뇌와 가슴에 꼭 저장되어 있다.


저 두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복집에서 공구로 맞춤 제작한 것이다. 햇빛을 가리기에 더없이 좋은 아이템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면서 흘낏 한 번 더 시선을 던지며 웃음을 유발하는 아이템이지만 올여름 완소 템이다. 아랍인의 히잡 같기도 하고, 밭일할 때 쓰는 두건 같기도 해서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아이템 되시겠다.


제2 연화봉에서 흥 게이지 상승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후, 산등성이를 따라 걸으면 제1 연화봉에 도착한다. 늦게 핀 철쭉이 아직 남아있어서 군데군데 불긋하다. 산철쭉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센 기운의 색의 철쭉이 아니라 진달래를 닮았다. 올해 산철쭉을 알게 되니까 눈에 많이 보인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체감한다. 소백산은 철쭉제로도 유명한데 사람이 철 따라 때 맞춰 찾아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산이 높아서 기온이 낮아 철쭉이 아직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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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정산은 내가 격하게 애정 하는 넓고 긴 능선이지만 뻥 뚫린 능선을 보려면 무려 연화봉은 해발 1383 미터, 비로봉은 1439 미터나 되는 지점까지 올라가야 한다. 고로 오르막 지옥과 내리막 지옥을 경험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시간에 맞추려고 올라온 만큼 다시 열심히, 열심히 내려갔다. 경사도는 올라올 때와 비슷하다. 올라왔으면 내려가야 하는 등산의 원리. 정상의 아름다움은 소유할 수 없고,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마음에 저장된 아름다움이 그리우면 기억 속에서 꺼내보다가 견딜 수 없으면 다시 보러 오면 된다. 그리워할 대상을 간직한 사람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다. 미움을 저장해서 꺼내볼 때마다 분노로 반응하는 사람보다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그리움에 저항하느라 소유하려고 한다. 사진을 찍고, 또 찍고 저장한 후 보고 또 보면서 그 날 경험했던 감정을 상기한다. 기록을 하면서 한 번 더 보고, 사진을 선별하기 위해서 여러 번 보게 된다. 곧 휘발되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경험을 잡아두려는 자발적이고 즐거운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백산의 명물이라는 희방폭포를 지나서 희방사역에 도착했다. 희방사역은 간이역으로 내가 여행자라는 걸 강하게 인식시켜주는 곳이었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역사에 '무쇠달 다방'이 있지만 닫혀있었다. 몇 명 안 되는 등산객만이 역을 어슬렁거렸다. 간이역은 기차가 도착하기 전에는 여행자의 차지였지만 곧 다시 고요한 마을의 이정표로 돌아갈 것이다. 기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는데 아름다운 오후 햇살 속에 잠을 자고 있는 냥이님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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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지는 햇살 속에 고요한 역과 텅 빈 철로를 왔다 갔다 하는 순간의 멜랑콜리. 오랜만에 열 일 한 두 다리 근육들의 아우성으로 노곤해서 실눈을 뜨고 노르스름한 저녁 햇살을 마주하며 마무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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