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6.토
덕유산에 덕유평전을 보러 갔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면 설천봉에서 내린다. 설천봉에서 시작해서 향적봉-중봉-백암봉-오수자굴을 거쳐 다시 곤돌라를 타고 내려오는 코스를 다녀왔다. 약 9-10km를 거리를 걸었다. 주차장 입구부터 발열 체크. 곤돌라를 탈 때마다 발열 체크. 얼른 ‘without 코로나’가 되어서 마스크 안 쓰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는 세상이 왔으면...
산에 다니면서 고소공포증이 많이 나아졌다. 곤돌라 진행 방향과 역방향으로 앉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무섭지 않았다! 설천봉은 해발 1520미터. 이 높이를 단숨에 편안하게 올랐다. 무주리조트 아래서 덕유산을 보면 스키 슬로프, 곤돌라 케이블, 리프트 케이블이 푸른 산에 세로줄로 그어져 있다. 편리함을 위해 아름다운 산이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훼손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편리함이냐 자연의 원형 보존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원형을 보존하면 접근성이 떨어져서 산을 잘 타는 소수만이 산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 봉우리에 오르는 여러 가지 편리한 수단 덕분에 등산에 서툰 사람들도 산을 즐길 수 있다. 즐긴다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관점이겠지만. 드론을 띄워 사진으로만 감상하는 것과 직접 두 발로 걸어서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체험이다.
아무튼. 곤돌라에서 내리면 시야가 탁 트인 설천봉이다. 쉼터가 있고, 맞은편에 나목 두 그루가 파란 가을 하늘 아래서 시선을 잡아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목이 되었니? 나목에 드러난 가지의 방향으로 미루어 바람이 센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의 산답게 나뭇가지들이 한쪽으로만 난 나무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설천봉에서 향적봉까지는 완만한 경사에 정비가 잘 된 길이다. 데크길 양옆에 높지 않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나뭇가지들이 현란하게 뻗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겨울이면 눈꽃으로 유명한 산이 되었구나. 어떤 일정한 패턴 없이 꼬불꼬불하게 뻗은 나뭇가지에 눈이 수북하게 앉은 풍경을 상상하며 걸었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새 탁 트인 향적봉에 다다른다. 중봉에서 백암봉까지 너른 능선이 펼쳐진다. 나무들이 가을맞이에 들어갔다. 잎들이 노란빛이 돌기 시작했다. 시야가 넓게 펼쳐지는 중봉에서 백암봉에서 짧은 여유를 부렸다. 사진도 찍고 찍히고, 눈에 보이는 대로 카메라에 풍경을 담아보려고 요리조리 몸을 굽혔다. 하산 후 사진을 보면 늘 아쉽다. 직접 눈으로 본 것만큼 못 담아서. 화창한 날씨는 아니지만 가을 하늘 특유의 맑음이 산을 감싸고 있다.
산에 가면 항상 계획이 좌절된다. 원래 계획은 오수자굴과 백련사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향적봉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중봉에서 오수자굴까지 예상치 못한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우거진 수풀에 돌과 나무들이 뒤엉켜 있어서 근력과 집중력이 많이 필요했다. 두 다리는 흔들거리고, 산바람만 맞으면 비염이 심해져서 콧물이 줄줄 흘렀다. 걷느라 바쁜 사이사이에 줄줄 흐르는 콧물을 재치있게 닦아내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면 집중력이 흐릿해진다. 등산지도에는 중봉에서 오수자굴까지 40분으로 나오는데 우리는 1시간가량 걸렸다. 등산안내 지도에 나오는 예상 소요시간은 누구를 기준으로 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발을 헛디디지 않으려고 한 발 한 발 정성(?)을 쏟아 천천히 옮겼다. 발아래를 보면서 다음 발을 어디에 딛어야 하는지가 그 순간에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인격 수양의 시간이 저절로 된다. 도망가고 싶지만 길은 하나다. 계속 가던 길을 가거나 등을 돌려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도 수고와 발품이 상당히 필요해서 망설여진다. 어차피 발을 들여놓은 거 원래 마음먹은 대로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럽다. 머릿속으로 갈팡질팡해도 발을 끊임없이 움직이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드디어 오수자굴에 도착했다. 결국 움직이는 발이 머리를 이겼다. 산에서 유효한 이 원리는 다른 일에도 적용된다.
'오수자'란 이름의 스님이 득도한 곳이란다. 먹이를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괴수 같다. 혼자였다면 무서웠겠지만 든든한 친구들이 있어서 굴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들어갈 수도 있나본데 우리는 급한 일이 있었다. 바로 점심 식사. 굴 앞에서 돗자리 폈다. 산에서 각자 싸 온 도시락과 과일을 펼쳐 놓고 점심을 먹을 때마다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가파른 길을 내려오느라 땀을 흘린 후라 밥맛은 꿀맛이다. 조그만 배낭 안에 저마다 이것저것을 신박한 방식으로 준비해 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나니. 생활의 지혜를 하나씩 배운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백련사까지 가면, 우리의 걷는 속도로 마지막 곤돌라 탑승 시간까지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힘들여 내려왔던 오수자굴길을 다시 올라가 중봉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 말은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는 말이다. 오수자굴에 온 목적이 점심 식사가 되어버렸다. 빡센 길을 일부러 걸어와서 점심을 먹고, 그 빡센 길을 다시 올라가다니! 하지만 돌이켜보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산에 오면 계획은 매번 바뀌고 수정된다. 계획이 좌절되었다고 표현하려다 수정된다고 적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안 되면 상황에 맞게 수정하는 게 현명하니까.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은 힘들지만 하루는 아름답고 즐거운 기억이 된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서 빽빽한 숲길도 걷고, 탁 트인 너른 능선도 걷고, 수풀을 헤치며 바윗길도 오르락 내리락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찍히고. 힘든 구간이 곧 끝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힘들게 걸은 날은 몸은 노곤할지라도 뿌듯한 무언가가 퐁퐁 솟아난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을을 누리고, 누빌 계획을 촘촘히 짜면서 신이 났다. 가을을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가을의 품으로 걸어들어가는 10월이 되겠다. 매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주말이었다. 당연한 일이 새삼스러운 일로 다가오는 것은 함께 한 친구들 덕분일까, 내 마음이 새롭게 바라보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