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 금-3. 토
나이 드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릴 때 모르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어릴 때는 내가 꽃이어서(^^;), 봄꽃, 새싹에 무심했다. 논문을 써야 하는 흑역사 시절, 도서관에 콕 박혀있다가 교정에 나왔더니 찬란한 4월 햇빛 속에 벚꽃이 흐드러졌다. 벚꽃 아래서 웃고 있지만 계절의 화려함만큼 나도 화려했다(고 믿고 싶다). 그때는 계절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몰랐다. 이제 계절마다 바뀌는 빛의 세기에 따라 식물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있다. 날씨에 따라 내 기분도 왔다 갔다 하고, 돋아난 새싹을 보면 예쁘다는 말을 저절로 하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존재 자체만으로 빛이 나는 새싹은 청춘과 닮아있다. 누구에게나 그 아름다운 청춘은 단 한 번만 있다. 아무리 정서가 다르다고 해도 청춘기, 지나간 청춘에 대한 향수로 인류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경주행 KTX 표는 한 달 전에 예매해 두었지만 경주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것은 벚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경주 출신의 예전 직장 동료가 경주에 자리 잡았다. 친구의 존재는 과거에 함께 보낸 시절로 돌아가는 마법이다. 내 과거, 즉 20대 후반을 같이 보낸 친구가 있는 경주에 현재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트레킹 친구들과 함께 갔다. 내 과거와 내 현재가 만나는 여행이었다. 미래에 둘 다 과거가 되겠지만 의미 있는 과거가 될 것이다. 시간이 더 흘러 경주에 오면 이 친구들과 함께 보낸 한 시절이 떠오를 것이다.
Day1
신경주역에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벚꽃 세상이었다. 시선을 어디다 돌려도 만개한 벚꽃이 블링블링. 벚꽃은 피었을 때도 아름답지만 떨어질 때도 아름답다. 꽃잎이 하나하나 허공에서 떨어져 바닥에 낱낱이 모여있는 모습도, 바람에 날리는 모습도 다 곱다. 벚꽃은 매년 비슷한 시기에 핀다. 매년 벚꽃을 본다. 동네에도 길이는 짧지만 벚꽃 터널이 있는데 벚꽃 보러 경주까지 가는 걸 이해하고 갈망하는 중년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제 경주하면 벚꽃이다.
곳곳에 민들레와 벚꽃잎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돋아나는 풀들, 나뭇잎 새싹의 여린 연두 빛깔. 봄의 색은 은은하다. 보문호 둘레길을 한 바퀴 걸어서 돌면서 벚꽃 속에 파묻힌 시간을 보냈다. 호수로 드리워진 벚나무 가지들, 물에 비치는 햇빛이 만들어낸 윤슬. 어른들이 동네 꽃나무 두고 남의 동네로 꽃놀이 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전문(?) 트레커. 경주에서도 산에 갔다. 남산의 486미터의 금오봉에 올랐다. 삼릉탐방소에서 초등학생도 왕복 2시간이면 오른다는 말에 두 친구는 운동화를 신고 올랐다. 나는 신발만 등산화였다. 산에 열심히 다녀 살이 쪄서 청바지가 안 맞아 통이 넓어 펄럭이는 요가 바지를 입고 등산을. 등산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해발 1천 미터의 빡센 산에 비하면 남산은 나지막하고 순둥순둥한 산이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지만 등산 복장도 아니고 스틱도 안 챙겨가서 발걸음을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등산은 등산이라 정신을 온통 발밑에만 집중하느라 역시 산 사진은 없다. 오솔길에는 진달래가 만발해서 진달래 꽃길이었는데 두 눈과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남산 입구인 삼릉 소나무 숲과 다 내려온 후에 만난 대나무숲 오솔길. 길에서 만난 매화(?). 식물은 너무 어렵다. 생김새가 비슷해서 구별하기 쉽지 않다.-.-
Day2
경주 친구는 토함산을 가고 싶어 했지만 대릉원으로. 비 온다는 소식도 있고, 전날 많이 걸어서 약간 피곤했다. 대릉원에 마지막으로 갔던 게 10년도 더 된 거 같다. 기억 속에는 능만 있는데 이번에 가 보니 고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었다. 커다랗고 둥근 능의 역사보다는 능이 만들어내는 곡선, 능과 능 사이에 보이는 벚나무와 고목들의 합주.
능 사이에 목련나무가 있는 이곳은 포토 스폿으로 SNS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곳이다. 사진 찍으려고 20명도 넘게 줄을 서 있는 곳이다. 질서 정연한 줄에 놀랐고, 다른 곳도 이쁜 데 유독 왜 여기서 줄을 설까, 궁금했다. SNS에서 풍경이 소비되는 방식을 보는 것 같았다. 인증 문화는 이름 없는 곳을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가 단숨에 버리기도 한다. 아마 내년에 이곳에 줄 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령이 어마 무시한 나무는 노인처럼 온전하지 않다. 나무줄기도 겹겹이 주름지고 푸석푸석하고 거칠다. 죽은 곳을 잘라내고 살아있는 가지들이 잘 자라도록 수술을 한 모습을 보니 측은하다. 사람도 늙으면 인공관절이며 각종 시술로 죽어가는 세포나 관절을 보완하는데 나무도 똑같구나. 고령의 나무의 길고 강인한 생명력은 아기 나무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 사방에 퍼진 오묘한 모양의 나뭇가지가 나무에 독특한 아우라를 만든다. 세월을 이겨낸 고목은 쭉 위로만 뻗은 아기 나무들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신비를 내뿜는다.
대릉원 주변은 관광지로 사람이 북적북적한데 대릉원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고즈넉한 시골 마을 분위기이다. 사방에 파릇파릇한 잔디밭이 펼쳐지거나 연두연두한 나무들이 골목을 지키고 있다. 빈 공간에 심은 잔디는 여백의 미를 선사했다. 오후에는 비가 내려 비 맞으면서 경주가 선사하는 여백의 미를 마음껏 누린 주말. 벚꽃 엔딩을 들어야 할 것 만 같은 주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