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 토
비가 올 거라는 걸 알고도 속리산으로 갔다. 악천후만 아니라면 날씨는 걷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안 걷기 시작하면 계속 안 걷게 되기 때문이다. 비옷과 체감 온도가 영하로 내려갈 경우를 대비해서 경량 패딩까지 단단히 준비하고 출발했다.
주차장에서 법주사를 거쳐 문장대로 올라가는 등산로 직전까지 길이 '세조길'이라는 이름의 산책로이다.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세조가 방문했을 때 걸었던 길이란다. 국립공원의 나무들은 연식이 오래되어 아우라 뿜뿜. 꽃 보다 나무가 좋은 이유다. 꽃은 활짝 필 때 화려하지만 질 무렵에 꽃잎이 마르고 색도 변한다. 이 모습이 힘 없이 늙어가는 사람 같다. 반면에 나무는 오래될수록 키도 크고 몸집도 굵어지고 잎도 무성해서 우러러봐야 한다. 피톤치드로 마구마구 발산하고. 나이 들수록 나무 같은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아무튼 세조길은 3.2km로 짙은 숲길이라 속세와 잠시 멀어지는 기분이다. 야자 매트를 깔아 놓아 폭신하다. 무임승차 산행 같았지만 그럴 리가. 산은 산이고, 속리산은 문장대 코스 말고는 뜻밖에 바위 산이다. 아, 한국의 산의 일관성이라니!
문장대에 거의 다다랐을 때 하늘은 안개로 덮이고 우박이 내렸다. 이런 날씨에 산행은 조심해야 하고 힘들지만 생생한 자연을 피부로 느낀다. 자연은 살아있고, 거대하며 위협적이라는 걸 뼛속까지 알게 된다. 눈에 안 보이는 바람의 존재를 좇는 게 가능하다. 한순간 아무것도 안 보였다가 바람 불면 안개가 갈라지고, 기암괴석이 나타난다. 맑고 화창한 날씨에는 알 수 없는 사실이다. 험한 상황에서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실이 분명히 있다.
문장대 정상석 위로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산에 있는 계단은 무섭;;; 반만 오르고 친구들이 내려오는길 기다리며 바위 친구들과 까꿍 놀이를.
내려오는 길은 편한 문장대가 아니라 문수봉-세심정-세조길로. 속리산이 바위산인 걸 새삼 알려주는 등산로였다. 바윗길로 된 경사 심한 내리막길은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길이다. 내려오는 동안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징징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살기 싫어도 살아야 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 같은 하산 길이었다. 어둠이 오기 전에 내려와야 하는 초조와 압박감이 있었고, 비는 계속 내렸다.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면 내 단점도 고칠 수 있을까. 힘든 일을 피하지 않고 해 볼 수 있을까. 몇 시간이었지만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완전히 어둡기 전에 무사히 내려와서 결과는 해피 엔딩이었다. 허벅지에 알이 배겨 아직도 뻐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