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숲길과 만나는, 블루로드

2020. 6. 27. 토

by 김남금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마 기간. 하늘은 흐려서 차창 안에서 보면 춥겠는데, 하는 생각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깨졌다. 더운 공기가 대기를 지배하고 있었고, 더운 대기는 내 온몸을 알뜰하게 누르며 더운 숨을 뿜어댔다. 음... 땀 좀, 아니 많이 흘렸다. 블루로드는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770km의 해파랑길 일부로 영덕 대게공원에서 축산항을 거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이르는 64.6km의 길"이다. 출처는 경북 블로그에서.




서울에서 영덕까지 당일로 가기에 먼 곳이라 그중 아름답다는 일부 구간만 걸었다. 축산항을 기점으로 바닷길과 대소산 봉수대까지 이어지는 소나무숲길이 하이라이트. 버스 안에서 바다 모습이 슬쩍 보이자 마음이 살랑살랑. 트레킹을 하기 전에는 바다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대상이었다. 트레킹을 하게 되면서 바다를 이리저리 걸으면서 코앞에서 만난다. 여러 각도에서 바다를 보면 바다가 만들어낸 해안선과 친해지게 되고, 바다는 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해변과 이어지는 입체적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전에 내게 바다는 보거나 들어가서 물놀이 하는 곳, 둘 중 하나였다. 걸으면서는 느끼는 바다는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이 언뜻보기에는 반복되어 단조로울지 모르지만 깊이 들어가면 매일 작은 차이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다름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처럼.


이번 블루로드 사진을 보면 그동안 바위와 많이 친해져서 동산처럼 솟은 바위 군락(?)을 넘은 트레킹이었다.



이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주말 휴가를 보내는 가족, 암벽등반가들이 해변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저 높은 바위 뒤쪽에서 시작해서 바위들을 타서 넘고 이쪽 편 해변까지, 두 발로 걸어서 넘었다! 나님이!! 막상 걸을 때는 몰랐는데 꽤 높은데 놀라고 신기해서 사진을 보고 또 본다. 암릉 산은 이미 해발을 알고 시작하지만, 해변에서 바위 위를 걷고 있는 걸 사진으로 보니까 엄청 높이 솟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슬금슬금 산에 다닌 덕분에 그동안 바위랑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 두 다리의 근력이 제법 늘기도 했지만, 두 발이 멈칫하면 앞에 있는 친구와 뒤에 선 친구가 끌어줘서 가능했다. 예전의 나라면 무서워서 아예 안 가고 포기했을 것이다. 힘들 거 같은데, 하는 마음의 벽을 쌓을 찰라에 친구들이 큰 동기를 부여해서 한 발 한 발 내딛는게 가능했다. 좋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니까 두려운 마음을 잠시 접어 집에 두고 나왔다.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걸으니, 아찔해 보이는 구간을 나도 모른 채 어렵지 않게 건넜다.


인간 관계도 이와 같다. 어떤 관계든 서로를 알아가게 되면서 초반에 가졌던 호감이 급감해서 그 사람의 본질이 눈에 들어오는 난코스에 봉착하게 된다. 상대에게서 보는 험난한 바위 군락을 만나면 내가 넘을 코스가 아니라고 철벽을 치고 몸을 돌려 안전한 곳으로 도망친다면, 늘 보던 사람만 보게 되고 시야는 점점 더 좁아진다. 하지만 상대가 보여준 난코스에서, 기분이 상하고 비위에 안 맞는 순간을 서로 참는 시간도 필요하다. 서로의 장애물 앞에서 외면할 게 아니라 전진하도록 끌어주면 그 관계는 험난한 구간을 넘을 수 있다. 숨을 돌린 후 뒤돌아 보면 고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오히려 두 사람이 함께 지지고 볶았던 장애물을 넘은 덕분에 유대감이 생겨서 관계의 뿌리가 더 단단해진다. 이 사진을 보고는 내 두 다리가 놀랍게도 열일해서 뿌듯하지만 노력하지 않고, 쉽게 놓아버린 관계, 외면한 관계를 돌아보면서 잠시 반성 모드의 스위치가 작동한다.


더운 날 타는 목마름을 챙겨간 과일과 축산항에서 만난 편의점 맥주로 풀면서 느낀다. 행복은 이런 소소한 데 있는 것을. 더위로 전신 세포가 축 늘어져 있는데 얼음 넣은 맥주 한 잔이 세포를 치켜세우고,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더위에 얼음물을 최장 시간 보관할 수 있는 방법, 햇빛을 가리는 숨 쉬기 좋은 마스크에 대한 쓸데없는 대화가 쓸모 있는 순간이다. 행복한 기분을 갖는데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자꾸 잊는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사진은 축산항 주변 풍경.


자, 쉬었으니 또 전진을... 대소산 봉수대에 오르는 길은 완만한 오르막이지만 더위에 허리가 똑바로 서 있기를 거부하고 자꾸 접힌다. 해는 그 사이에 뉘엿해졌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격하게 애정하는 시간. 봉수대에 오르자 축산항 전경을 360도로 감상할 수 있다. 과거 봉수대 근무자는 이 산길을 매일 출퇴근했다니, 우리와 클래스가 다르네. 지금은 잉여 지방을 태우고, 심신단련을 하기 위해 굳은(?) 의지를 가지고 오르내리는데 말이다. 그때는 생계이자 생존이었고, 지금은 그저 잉여의 활동이지만 잉여 활동을 하기 위해 실은 더 많은 의지가 필요하다. 물질적 풍요와 과잉에 빠진 우리의 심신은 과연 진화하고 있는 걸까.



봉수대에 올라 신이 나서 한 바퀴 돌고 오후 햇살에 실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는다. 내려갈 일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노곤함이 몰려온다. 몸을 쓰는 활동은 그 순간의 동작에 집중하느라 잡념이 달라붙을 틈이 없어서 좋다. 다만 후유증으로 멍한 뇌가 돌아오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서 문제지만. 이 순간만큼은 코로나가 무엇이며, 앞으로 살아갈 것에도 배짱이 두둑하게 생긴다. 두 발에 의지해서 한 발 한 발 옮긴 것처럼, 다가오는 시간들도 그렇게 걸어가면 되겠지. 뭣이 문제다냐.


마무리는 바위에 앉은 흑염소 한 쌍으로. 발길 닿는 곳으로 걸어왔을 염소들. 편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는 세상 근심 없이 되새김질을 했다. 루이스 브뉘엘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장면이었다. 블루로드에서 얻은 두둑해진 배짱을 마음에 접어두었다가 쫄보가 될 때마다 꺼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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