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알 Sep 23. 2021

사파의 꾸꾸

사파에 가기로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느 블로그에서 계단식 논을 보고 '이곳에 가야겠어' 의지가 타올랐다. 어딘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지를 보고 충동적으로 정할 때가 많다. 이미지는 힘이 세서 안락한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게 만드는 동기이자 추진력이 되곤 한다. 사파는 하노이에서 400km 떨어진 곳에 있다. 차를 타고 6시간쯤 가야 한다. 고산 지방이라 어느 시점부터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서 몸이 차가 기울어질 때마다 심하게 흔들린다. 



사파를 즐기는 방법은 사파 초입에 있는 마을 라오차이에 머물거나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터라 깊숙이 들어간 산골 마을 지앙타차이에 있는 홈스테이를 예약했다. 하노이에서 호텔 직원의 조언을 받아들여 현지 투어에 합류했다. 하노이에서 캐나다인 브루스, 독일인 친구 요간과 마커스, 독일인 커플 애나와 마이클, ATP트레블 현지 가이드 하, 그리고 내가 하노이에서 만나서 사파 관문인 라오차이까지 가서 지앙타차이의 홈스테이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라오차이는 관광객에 굶주린 것처럼 길마다 개발 중이었다. 여기저기 호텔로 쓰일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건축의 현장 한가운데 있는 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오자 사파 원주민인 몽족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다가와 인사를 하더니 따라와서 처음에 깜짝 놀랐는데 이 또한 사파에 있는 트레킹 문화였다. 트레킹 여행자들이 걷는 동안 몽족 일행이 함께 걸으며 친구가 되어 준다. 말벗도 해주고, 하릴없이 미소도 보낸다. 우리는 잠시 스쳐가는 나그네라 사파를 터전으로 하며 전통 의상을 입은 몽족의 환대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었다. 


몽족들은 파트너를 정해서 친구 곁에서 걷는다. 꾸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오늘 내 친구가 되어준다고 말했다. 꾸꾸는 마흔 살로 아이가 셋이라고 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옷을 입은 꾸꾸의 얼굴에는 삶의 흔적이 드러났다. 사파에서 만난 몽족의 많은 여성이 손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고 무언가를 꿰매고 엮는 작업을 했다. 꾸꾸는 어깨에 짚을 두르고 계속 짚을 엮었다. 시선은 다른 데 있으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걸으면서도 말하면서 이렇게 엮은 짚은 수공예품을 만드는 천이 된다. 꾸꾸의 손톱 밑에는 신성한 노동의 세월이 검게 묻어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쌓여 보지 않고도 짚으로 천을 만드는 기술을 습득한 걸까. 


가운데 있는 사람이 내 친구 꾸꾸


우리는 이 갑작스러운 화동인 몽족과 도란거리며 뜨겁고 습한 공기에 적응하려고 애쓰면서 걸음을 옮겼다. 가족에게, 연인에게, 친구에게 여행이 필요한 이유는 대화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걸으면서 다른 나라에서 온 우리 일행은 서로의 문화에 대해 질문하고 답했다. 그날 아침에 처음 만났지만 함께 밥 먹고, 차 마시고, 걸으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갔다. 몽족 여성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일찍 결혼하는 몽족의 특성상 여자들은 수공예품을 만들고, 그 물건을 팔면서 돈을 벌었다.


꾸꾸가 끝까지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쉼터에서 갑자기 이들은 자신의 친구 앞에 물건을 내놓았다. 꾸꾸는 파우치를 내 앞에 내놓더니 대뜸 "얼마를 줄 수 있어?" 하고 물었다. 기습적 질문이었다. 하지만 두 시간쯤 함께 걸으며 미소를 나눈 터라 내 앞에 내놓은 물건을 안 사기 힘들었다. 그건 물건 값이 아니라 길벗이며 말동무를 한 대가였다. 나는 물건 값을 전혀 모르는 숫자 바보였다. 꾸꾸의 시간에 대한 예의로 얼마를 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베트남 물가가 아니라 한국 물가를 떠올리며 가격을 제시했다. 실제 가격보다 25배나 더 주고 크로스로 멜 수 있는 파우치를 세 개나 샀다. 이 사실을 곧 알게 됐지만 흥정은 이미 이루어진 후였다. 바보 같았지만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봤자 우리 돈으로 2만 원 정도였고, 꾸꾸가 나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기기를 바랐다. 속았다는 생각은 정신 건강에 나빴다. 꾸꾸가 부른 값이 아니라 내가 제시한 값이므로 꾸꾸는 잘못이 없었다. 


수작업인지 의심스러운 파우치와 언니네 마당 에코백. 트레킹인 줄 몰라서-.-1박 2일 동안 필요한 짐을 에코백에 넣어갔다. 조금 부끄러웠다. 


꾸꾸 말고도 다음날 아침에 나머지 일행은 하루 더 트레킹을 하며 사파 산골 마을로 더 들어갔다. 부루스와 나만 다시 라오차이로 돌아가는 트레킹을 했다. 아침에 길을 안내해줄 소녀가 민박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선한 아침 햇살 속에서 소녀는 꾸꾸처럼 계속 무언가를 엮고 있었다. 말을 시켜도 수줍게 웃었다. 몽족으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중년이 되어도 손에서 작업을 떼지 못하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므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만큼 강렬한 경험이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그때는 몰랐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