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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Sep 09. 2021

그때는 몰랐습니다


프랑스 일 년 살기는 프랑스 중부 투르(Tours)에 있는 어학원(Institut de Touraine)에서 시작했다. 투르는 누아르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성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만난 투르의 첫인상은 캐시미어 슈트를 입고, 페도라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노신사 같았다. 한눈에 보아도 오랫동안 자신만의 취향을 고집스럽게 갈고 닦아 온 사람 같은 도시였다.    


어학원은 쇼핑가인 나시오날 가에서 걸어서 30분도 채 안 걸리는 구시가에 있다. 고성을 닮은 고풍스러운 성을 닮은 어학원 건물을 처음 보았을 때 와인 한 병을 비운 후 나올 법한 흥이 솟구쳤다. 이곳에서 공부하면 프랑스어가 저절로 나올 것 같았다. 어학원에는 세계 여러 도시에서 온 학생들이 모였다. 학생들의 젊음과 자유분방은 노신사의 견고한 취향을 위협하는 것 같았다. 


 어학원 공식 수업은 오전에만 있었고, 오후에는 프랑스 건축과 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다양하고 수준 높은 강의가 무료로 개설되었다. 한때 프랑스 문학 전공자로서 프랑스어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의욕적으로 오후 강의에 참석했지만, 걸음마 수준의 내 프랑스어 실력으로는 귀를 아무리 쫑긋해도 외계어였다. 못 알아듣는 강의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은 자존감을 갉아먹고 지치게 했다. 몇 번 참석 후 아쉬웠지만 포기했다. 프랑스어를 단시간에 정복하려는 야무진 첫 꿈이 깨졌다. 언어 정복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속도전이 미덕이라는 ‘지령’에 나도 모르게 따르고 있었다. 생각과 다르게 말이 늘지 않자 초조했다. 그림 같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 달떴던 상태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는 여행자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어학원에 갔다가 오후에 집에 돌아오는 지루한 일상이 이어졌다. 답답한 날이면 아무 버스나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데 두세 시간 정도 걸렸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다. 그런 날이면 나 자신이 못마땅했다.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 아닌지, 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였다.    

  

 첫 달에는 프랑스인 부부 집에서 하숙했다. 세탁과 청소, 식사 준비 등을 직접 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지만, 편한 점이 불편했다. 하숙집에서는 주인 부부가 지켜온 규칙이 있었고, 하숙생은 그 규칙을 따라야 했다. 저녁 식탁에서는 종종 뒤가 마려운 강아지가 되었다. 나는 고기를 잘 안 먹는 터라 저녁 식사에 고기 요리가 나오면 내 몫의 음식을 종종 남겼다. 그때마다 주인 부부가 신경 쓰는 게 신경 쓰였다. 어학원 주변을 차츰 알게 되면서 하우스 셰어를 알아 보고 이사를 준비했다. 한 달 후에 ‘편해서 불편한’ 하숙집에서 독립(?)해서 어학원 근처로 거처를 옮겼다. 룸메이트는 대만인 두 명, 아일랜드인 한 명, 노르웨이인 한 명, 벨기에인 한 명이었다.      

룸메이트 모두 어학원에 다녔다. 우리는 모두 시간 부자였다. 어학원에서 돌아오면 거실 겸 주방에 모였다. 우리의 저녁 단골 메뉴는 라면처럼 끓이기만 하면 되는 인스턴트 스파게티였다. 면만 삶은 후 마트에서 산 유리병에 든 소스를 붓기만 하면 훌륭한 한 끼 식사였다.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맛이 보장된 맛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와인 천국에서 와인 병을 따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였다. 우리가 마트에서 사 온 와인은 고작 2,3유로였다. 거실에서 누군가 와인 병을 따면 소파에, 식탁에 하나둘씩 앉아 와인 한 병을 비울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스파게티와 와인,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거실 파티’가 열렸다. 


 이 작은 파티에 낄 때도 있었다. 룸메이트들과는 불편한 프랑스어보다 영어로 주로 말했고,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영어에 능숙했다. 나는 영어로 이어가는 빠른 대화에 끼어들 틈을 노렸지만, 어려웠다. 내 영어 실력은 프랑스어 실력과 비슷했다. 책을 찬찬히 읽을 수는 있었지만, 대화는 한 방향으로 이루어진 책 읽기와 달랐다. 상대와 핑퐁처럼 말을 주고받으려면 언어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었다.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려는 적극성, 순발력, 재치 등이었다. 이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나는 내향적이었고, 재치와 순발력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부족한 언어를 탓하며 움츠러들곤 했다. 대화하며 얻는 자발적 즐거움보다 언어 학습에 대한 의무감으로 앉아 있곤 했다. 이럴 때면 투르에 올 때 의기양양했던 모습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곤 했다. 사람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소극적 태도 탓이었는데도 나는 부족한 언어 탓이라고 믿었다.      


 룸메이트들은 어학원에 갈 때는 20분 전에 일어나 눈곱만 떼고 나갔지만, 금요일 오후에는 부지런해졌다. 샤워하고, 풀메이크업을 했다. 금사가 들어간 반짝이는 스타킹을 신고, 치마를 입고 외출했다. 차려입고 가는 곳은 뻔했다. 구시가 중심지인 플뤼므로 광장에 모였다. 광장 뒷골목에 있는 소박한 바에 가서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새벽까지 수다를 떨다 돌아왔다. 아니면 영화를 보러 가든가, 더 멀리 가는 이들은 춤추러 클럽에 갔다. 금요일 밤이면 따분하고 고요한 시골 골목에는 청춘이 발산하는 열기가 메아리쳤다. 



 나는 자신감도 없고, 숫기도 없어서 불금도 구경하곤 했다. 벨기에에서 온 룸메이트는 친절하게 내게 먼저 손을 내밀곤 했다. 그는 내 어눌한 말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었다. 그와 금요일 밤거리를 가끔 쏘다녔다. 벨기에는 프랑스어와 플랑드르어 두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플랑드르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살았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초콜릿 가게에서 일했다. 손님이 주로 관광객이라 프랑스어가 필요해서 6개월 동안 배우러 왔다. 내가 이사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벨기에로 돌아갔다. 그의 방에 열아홉 살 남동생 티보가 바톤을 이어받아 들어왔다. 그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부모님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고, 누나와 마찬가지 이유로 프랑스어를 배우러 왔다. 


어느 날 저녁 ‘거실 파티’에서였다. 티보는 부모님이 어학원 수업료와 체류 비용을 내주고 있지만 돌아가서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투르에 오기 전에는 부모님이 소유한 집에서 살았지만, 매달 집세를 냈다고 했다. 티보의 말을 듣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부모가 아직 공부하는 자식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는 세상에 사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우리는 한 곳, 어쩌면 직업 안정성을 향해 젊음을 탕진하는 것은 아닐까. 안정성에 목메는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투르 어학원에 모인 학생들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구체적 계획 없이 어학원에서 ‘방랑’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같은 반 친구 중에 아일랜드인 친구 밀푀브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다. 

-프랑스어는 왜 배우는 거야?

-여기서 몇 달 동안 불어를 배우고, 따뜻한 남프랑스로 갈 거야.

-거기 가서 뭐 할 건데?

-카페에서 웨이트리스 일자리를 구해서 돈을 벌면서 살아 볼 거야. 

-그다음에는 뭘 할 건데?

-모르겠어.  

    

 뭘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우리에게는 진학이란 답이 정해져 있으니까. 밀푀브처럼 어학원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외국어를 배우며 자유 시간을 보내면서 진로를 탐색했다. 아니면 자기 나라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가게에서 일했다. 이들에게 대학은 정답이 아니었다. 이들이 속한 사회에도 계급 사다리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은 사다리를 걷어차려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가 속한 ‘피로 사회’는 계획 없이 사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말한다. 촘촘하게 계획표를 만들고, 계획표대로 달성해서 얼른 ‘더 나은 미래’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더 나은 미래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실체를 잘 몰랐지만, 나도 더 나은 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에 한국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도서관이었다. 열심히 사전을 뒤적이며 책을 읽어봤자 말이 느는 데 도움이 별로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반면에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은 책상머리에서 머리 싸매며 사전을 뒤적이지 않았다. 언어 특성상 같은 어족이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더 나은 학벌에 대한 열망이 없어서인 것 같았다. 어학원에서 보내는 한 철을 낯선 도시에 살아 보는 ‘체험’으로 여겼다. 내가 모르는 느긋함이었다. 이들은 어학원 숙제만 겨우 끝내고는 놀러 다녔다. 월요일에 어학원에서 만나면 주말에 놀러 다닌 이야기를 했다.   

   

그때 몰랐던 것이 있다. 한 나라의 현재를 이루는 것은 도서관이나 책에 있는 게 아니라 거리에, 식당에, 카페에 있다는 것을. 내가 머무는 도시의 속살을 외면하고, 죽은 방식으로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주입한 미래에 못 들어갈까 봐 전전긍긍하느라 현재를 살지 못했다. 낯선 도시에서 다시 살아 볼 기회가 있다면 책상머리를 지키는 대신 동네 카페와 바에 매일 출근해서 카페 주인과 바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들이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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