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모메 식당>
2007년 영화 <카모메 식당>은 세 여성이 핀란드 헬싱키 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만나 ‘내적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통해 먼지가 뽀얗게 앉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반짝반짝하게 닦는 이야기이다.
사치에는 ‘갈매기’ 식당을 개업한 지 한 달. 한 달 동안 손님은 한 명도 없었지만, 사치에는 긍정의 여신이다. 빈 식당에서 무기력하게 손님을 기다리지 않고 마치 식사를 마친 손님이 방금 나간 것처럼 테이블을 닦고 또 닦는다. 주방은 반짝반짝 빛이 나게 닦는다. 저녁이면 집에서 평생 해온 무릎 걷기 운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다. 사치에의 자그마한 체구에 깃든 습관은 멘탈을 보호하는 갑옷이다.
서점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 미도리가 사치에게 묻는다.
“손님이 안 오면요?”
“문을 닫으면 되죠. 하지만 문을 닫는 일은 없을 거예요. 손님이 올 거니까요.”라고 사치에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사치에의 과감한 자기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사치에는 상황에 굴복하는 포로가 되지 않는다. 대신 부지런함과 열린 마음을 장착하고 손님이 식당에 찾아올 날을 준비한다. 파리 날리는 식당이 아니라 맛집인데 손님들이 미처 못 알아보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미도리가 파리나 런던이 아닌 헬싱키에 온 이유는 눈을 감고 지도를 손가락으로 찍었더니 핀란드였다. 미도리는 왜 눈을 감고 갈 곳을 찾아야 했을까? 영화에서 이유가 드러나진 않지만, 미도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떠나고 싶은 욕구 혹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 계획 없이 핀란드에 온 미도리는 자기 확신에 넘치는 사치에를 만난다. 미도리는 핀란드에 오긴 했지만 막상 뭘 할지 모른다. 사치에의 호의로 함께 지내며 갈매기 식당 일을 돕게 된다.
미도리가 핀란드를 선택한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 우연에는 떠날 결심이 들어있다. 그리고 진짜 집을 떠나온 강한 의지가 숨어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을, 나는 조금 수정하고 싶다. 하나의 문을 닫아야 다른 문을 열 수 있다로. 문은 저절로 닫히거나 열리지 않는다. 직접 닫고 열어야 한다. 미도리가 떠나지 않고 다른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면 사치에를 못 만났을 것이고, 다르게 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눈을 감고 지도를 펼쳤을 때 미도리는 이미 다른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셈이다.
또 한 명의 여성이 갈매기 식당에 등장한다. 마사코는 20년 동안 병든 아버지를 간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날 평생 느껴 본 적이 없는 자유로움에 바로 핀란드로 날아왔다.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왜 핀란드인가? 마사코는 TV에서 사람들이 허공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대회, 사우나에서 오래 버티는 대회 등을 보았다.
"쓸모없는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즐거워 보였어요. 알고 보니 핀란드 사람들이었어요."
마사코가 핀란드에 온 이유이다.
마사코는 ‘즐거운 사람들’이 사는 핀란드에 왔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짐을 기다리며 매일 항공사에 전화한다. 그러다 ‘갈매기’ 식당을 발견하고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다. 사치에는 마사코의 이야기를 듣고 말한다.
“짐을 잃어버려서 불편하시겠어요. 중요한 것도 들었을 텐데요.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시면 빌려드릴까요?”
사치에의 말에 마사코는 삼 일째 짐만 기다리며 같은 옷을 입고, 항공사에 전화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바로 질문의 힘이다. 마사코는 별로 중요한 것도 들어있지 않은 가방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얽매였다. 가방이 와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사로잡혀 시간을 낭비했다. 마사코는 같은 옷을 입을 이유가 없었다. 일단 인식하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덜 어렵다. 마사코는 옷 가게에 가서 옷 몇 벌을 산 후 새 옷을 입고, 갈매기 식당에 다시 나타난다. 아픈 아버지를 간호하는 삶에 매였던 탓에 자유를 얻었지만,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마사코는 사치에의 배려가 담긴 말 덕분에 쓸데없는 기다림에서 빠져나왔다.
세 여인이 겪은 시간의 결이 다르다. 각자 다른 경험체이며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존재이다. 이런 세 여인에게 자라난 친밀감에 우정이란 단어는 소란스럽다. 세 사람은 친밀감을 쌓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에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습관에서 통용되는 질문을 주고받는다. 이 질문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잔잔한 물수제비를 만드는 돌멩이가 된다.
경험은 개인의 고유한 역사를 만들고, 때로는 타인에게 공감을 보내는 수단이자 타인을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거창한 레스토랑이 아니라 배고플 때 편하게 들러서 배를 채우는 ‘갈매기 식당’에서 세 여인이 구축한 세계의 담장이 조금씩 낮아지며 시나브로 내적 친밀감이 쌓인다.
자그마해서 핀란드인의 눈에는 어린이처럼 보이는 사치에는 왜 식당을 열었고, 오니기리를 시그니처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을까? 일찍 엄마를 여읜 사치에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일 년에 딱 두 번, 운동회 날과 소풍날에만 아빠가 만든 오니기리를 먹을 수 있었다. 연어, 매실 등 아이들이 선호하지 않는 재료였지만,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고 말한다. 사치에의 확신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왔다. 음식이나 커피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것이 제일 맛있으니 식당에 손님들이 올 것이라고.
사치에의 믿음대로 손님은 하나둘씩 늘어난다. 한 번 왔던 손님은 음식을 한 입 넣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온다. 어느 날 점심 무렵 갈매기 식당은 손님으로 가득 찬다. 사치에는 자기 확신이 보답받을 때까지 자기 연민이나 불안에 휘둘리지 않았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뿐’이라는 세상 간단하면서도 ‘대단한’ 결심을 의지로 이어간다.
우리에게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파스칼 메르시어란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스위스 태생의 독일 철학자 페터 비에리는 <자기 결정>에서 말한다. 자기 결정적 삶은 질문을 제기하는데 익숙해지는 삶이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것은 말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이 지녀온 언어적 습관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사치에, 미도리, 마사코는 서로 질문하며 당연한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나는 못 보지만 타인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의 질문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문을 여는 손잡이로 받아들이는 대인배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