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앤>
책이든 영화든 공감하고 읽어낼 수 있는 범위는 경험만큼이라고 한다. 어릴 적엔 <빨강 머리 앤>을 보면서 앤에게 감정을 이입했다. 저세상 텐션을 소유하고, 마릴라 아줌마가 시킨 일은 미뤄두고 공상에 빠져 소동을 일으키고, 엉뚱한 질문을 해서 마릴라 아줌마의 핀잔을 듣는 재미있는 소녀였다. 내가 앤의 나이였을 때 내 생각과 감정을 또렷하게 말하지 못했고,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앤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라 끌렸다.
몇 년 전에 애니메이션 <빨강 머리 앤>을 정주행 했다. 앤을 사랑스럽다는 진부한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이 집 저 집 전전하며 집안일을 하고, 베이비시터를 했어도 결국 고아원에서 살게 된다. 맡겨진 일을 넘치게 해내도 입양되기에는 매력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설명한다. 그럼에도 앤은 자신의 환경에 무릎 꿇지 않는 긍정의 여신이다. 모든 것과 교감하는 초능력을 발휘하고, 아침에 눈 떠서 하루를 보낼 생각만으로도 행복 지수 최고점으로 질주한다. 어른의 부당함에는 또박또박 의견을 말할 줄도 안다. 린드 버그 아주머니가 앤의 외모를 평가하자 반박한다.
“깡마르고 못생겼다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하세요? 주근깨가 많고 머리가 빨갛다니요? 아주머니는 예의 없고 무례하고 인정도 없는 사람이네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소설 배경은 빅토리아시대로 추정된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브론테 자매의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의 역할은 가사노동과 결혼, 육아 등에 고정되었고, 사회활동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앤이 사는 곳은 작은 시골 마을 공동체 에이번리이다. 공동주택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꺼림칙해서 눈인사 정도만 나누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웃의 관심은 지나치다. 비혼인 마릴라 남매를 보는 시선도 곱지 않다. 이웃에 사는 린드 부인은 마릴라 남매를 두고 혼잣말한다.
“이렇게 외딴곳에 둘만 덜렁 사니 매튜나 마릴라나 별난 것도 당연해. 나무와 친구가 될 것도 아니고. 하긴 그 둘은 그걸로 족하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사람을 보고 살아야지. 뭐, 두 사람은 만족하는 거 같긴 해도 그건 익숙해져서 그런 거지. 사람은 어디든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 목을 매달아 놔도 거기에 익숙해진다는 아일랜드 속담도 있잖아.”
이웃집 저녁 메뉴까지도 이야깃거리였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면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퍼지던 때였다. 결혼은 기본값이었고, 남녀 성역할은 분명했다. 이 기본값에서 벗어난 소수자 세 사람이 어울려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매튜는 환갑이고 마릴라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적은 나이가 아니다. 남매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휘둘리지 않는다. 매튜가 농사일이 힘에 부쳐 일손을 돕기 위해 남자아이를 데려오려 하고, 마릴라는 이 계획을 린드 부인에게 말한다.
“잔심부름도 시키고 제대로 가르치기에도 좋은 것 같아요. 아이한테 좋은 가정환경도 만들어 주고 학교 교육도 받게 하려고요.”
“마릴라, 솔직하게 말할게요. 아주 어리석고 위험한 일을 벌인 거 같아요.”
“위험한 거야, 세상 살면서 사람 하는 일이 다 그렇죠. 그렇게 따지면 부부가 임신해서 아이를 낳는 것도 위험 부담이 있죠. 아이마다 전부 잘 크는 건 아니니까요.”
앤이 교직을 이수하는 퀸스 학교에 진학하기로 하면서 돈 걱정을 하자 마릴라는 말한다.
”그런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오라버니와 내가 널 키우기로 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다해 주고 교육도 부족함 없이 받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단다. 난 그럴 필요가 있건 없건 여자도 자기 생계를 꾸릴 능력을 갖추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 “
마릴라 남매는 삶의 내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다. 깡마르고 주근깨투성이 수다쟁이 앤이 잘못 배달된 택배처럼 도착했지만, 오히려 긍정적 자극제가 된다. 마릴라는 웃음 근육을 쓸 일이 없어서 웃음 근육이 잘 안 움직였다. 어른으로 오래 살면 웃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어제 태양과 오늘 태양, 내일 태양이 다 똑같다고 단정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새로운 날이 펼쳐지는 경이로움을 ‘당연함’ 카테고리에 넣는다. 이 카테고리에 항목이 쌓일수록 웃음 근육도 퇴화한다.
경험은 양날의 검이다. 경험 덕분에 지혜를 얻지만, 경험 탓에 사물을 하찮게 본다. 남매는 해가 뜨면 밥 먹고,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든다. 우리의 일상도 비슷하다. 습관이 좋든 나쁘든 습관에 푹 잠기면 편안해서 바꿀 이유가 없다. 남매가 지켜온 일상에 앤은 돌을 던져 물수제비를 뜬다. 물수제비 물결이 남매의 마음에도 퍼진다. 흥분, 이해, 포용, 타협, 흐뭇함 등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저녁마다 가슴을 채운다.
”손안에 작고 야윈 손이 닿자, 마릴라의 가슴에서 뭔가 따뜻하고 기분 좋은 기운이 샘솟았다. 그 낯선 포근함에 마릴라는 마음이 어수선했다. “
앤의 흥분, 설렘, 슬픔, 즐거움은 보슬비처럼 남매의 마음에 조금씩 스민다. 남매처럼 독립적이고, 주체성 있는 삶의 이면에는 독선이 납작 엎드려 고개를 내밀 때를 기다린다. 독선과 독단이 지나치면 고립에 빠지고, 고립은 노화를 촉진한다. 노화는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만이 못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람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 물정에 어두워지고, 관계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범위도 좁아진다. 고립이 몸에 착 감겨 편안해지면 세상과 단절된다. 마릴라와 매튜 남매가 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집 밖 세상과 점점 멀어졌을 것이다.
낭송도 하고, 연극도 하는 발표회는 마을 사교장이다. 마릴라는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도, 사람들이 뜬구름 같은 흥분에 들뜨는 것도 탐탁지 않아 발표회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앤이 발표회에서 낭송을 하게 되어 20년 만에 처음으로 간다. 발표회가 끝난 후 말한다.
“나는 이런 발표회를 한다기에 썩 내키지 않았는데, 뭐 나쁠 건 없는 것 같아요.”
앤은 고립이란 푹신한 방석에 주저앉으려는 남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앤이 보는 세상과 남매가 보는 세상이 섞이고, 마릴라는 조금씩 자신의 경계를 허문다.
혼자 잘 살려면 세상을 이어주는 창이 있어야 한다. 귀에 피가 나게 들은 말이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세상을 읽어내는 데 가장 풍부한 텍스트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앤처럼 적극적인 사람들은 모임에서 활동하고, 때로는 모임을 주도한다. 반면에 마릴라 남매처럼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적은 사람은 새로운 만남이나 모임을 꺼린다. 나가려면 밤새 고민하고, 어쩌다 용기 내도 시간이 다가오면 취소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낯섦이 불편하고, 필요성을 의식하지 못한다. 둘러보면 어느새 한 줌 있던 친숙한 친구나 지인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매일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고, AI 기반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다. AI 활용법에 뒤처질까 봐 불안해서 SNS나 유튜브의 과잉 정보에 허우적거린다. 가상 세계 채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보거나 듣기’이다.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 이는 내 방식대로만 해석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 세상과 연결된 착각에 빠지는데 진짜 삶을 이끌어주는 상호작용이 빠져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의견과 감정에 필요하다면 맞서고, 수용하며 타협할 수 있어야 차가운 독방에 갇히지 않는다. 마릴라 남매와 앤 보여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