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능선의 매력, 소백산

2020. 6. 16. 화

by 김남금


소백산이 뒷산인 양 6월에만 두 번이나 다녀왔다. 산세가 험하지도 않고 아기자기한 것도 매력이지만 비로봉까지 가는 길에 펼쳐진 너른 능선에 홀딱 반해서 눈을 감아도 생각나고 자꾸 보고 싶어서 사진을 보고 또 본다. 이쯤 되면 소백산과 사랑에 빠졌다고 할 수 있겠다. 눈을 감아도, 누워도 연인의 얼굴이 떠오르고, 연인의 사진을 보면 배시시 미소를 짓게 되는, 사랑에 빠진 이가 되었다. 이 기분도 나쁘지 않네. 이번에는 어의곡에서 시작해서 비로봉에 오른 후 다시 어의곡으로 내려왔다.


어의곡에서 비로봉까지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오르막이다. 등력이 쌓여서 2월에 갔을 때보다 등산로가 착해 보였다. 오르막이야 어쩔 수 없고. 왼쪽으로 계곡을 끼고 올라가서 졸졸졸 물소리가 들린다. 나뭇가지들이 늘어지고, 늘어진 가지에는 녹음 직전의 잎들이 무성해서 계곡의 얼굴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눈을 크게 뜨면 계곡 줄기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올라가는 길 왼쪽 계곡에는 바위에 이끼가 살고 있다. 겨울에는 벌거벗은 나무들 아래에서 햇빛을 독차지 하지만 여름이면 나뭇잎들이 만든 파라솔 아래 앉아있다. 등산로에 돌들이 보이지만 흙산이라 험하지 않다. 우거진 나뭇잎들이 그늘 지붕을 만들어서 내내 오솔길을 걷게 된다. 겨울에 봤던 모습과는 180도 변신한 모습이다. 소백산, 너~어 매력의 끝은 어디인 거니?


이번 산행의 콘셉트는 거북이 산행이다. 육체적 한계로 빨리 올라가는 건 불가능해서 붙여본 콘셉트지만 목표만 보고 전진할 때와는 많이 달랐다. 시작할 때부터 천천히 쉬면서 올라가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니까 같은 시간이 걸려도 더 여유가 생겨서 구석의 풍경도 눈에 넣을 수 있었다. 마음이란 어떤 때는 요물이다. 어떻게 매뉴얼을 설정하느지에 따라서 없던 여유도 생기고, 안 보였던 것도 보이니 말이다.


어의곡 주차장에서 비로봉까지는 5.1km인데 이 지점이 3km쯤 왔을 때가 아닌가 싶다. 잣나무인지 소나무인지 모르겠지만 키 큰 나무숲인데, 가지들이 앙상하게 말라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잎이 없는데도 울창한 모습이다. 고도가 많이 높아져서 바람은 서늘했다. 햇볕은 쨍쨍하고 이따금씩 쉬-익 바람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지상에서 우리가 바람 소리를 들을 때는 태풍 직전이나 날씨가 궂을 때다. 바람은 심술 맞게 자신의 출현을 알려야 우리는 바람을 의식한다. 하지만 숲 속에서 만나는 바람은 순하다. 나뭇잎들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순한 바람이 곁을 지나간다.


소백산 점심 도시락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주문했다. 도시락은 어의곡 주차장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무인으로 찾아가는 신박한 시스템에 대한 기쁨도 잠시. 주차장 한쪽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도시락을 들었더니 돌덩이 같았다. 보온 도시락에 달걀말이, 멸치조림, 무말랭이, 황탯국이 정성스레 담겨있었고 맛도 좋았다. 하지만 오르막과 사투(?)해야 하는 등산객이 들고 가기엔 너무 무거워서 두 번은 주문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는 새드 엔딩이다.


아무튼 도시락도 즐겁게 먹고, 과일도 먹고, 먹은 만큼 땀도 흘리고 오르고 또 오르면, 갑자기 오르막이 뭐예요, 시치미 뚝 떼고 넓은 능선이 시작된다. 초록 지붕 사이로 스미는 빛을 받으며 한 사람이 걸으면 적당한 오솔길을 따라 오르다 갑자기 시야가 트이면서 넓어지는 개방감에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백문이 불여일견. 보실까요.


구름을 이고 있는 탁 트인 초록 능선을 바라보면 솟구치는 도파민. 이럴 때면 나는 전생에 방목되던 소나 양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눈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놓칠까 봐 조바심이 나서 360도 몸을 돌려 사방을 스캔을 한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어여쁘다. 뭉게구름 아래에 싱그러운 초록들로 혼탁한 시선과 정신이 맑아진다.


어의곡, 국망봉, 비로봉으로 길이 나누어지는 어의곡 삼거리에 도착한다. 어딜 봐도 파랗고 푸르구나. 삼거리 이정표 옆에 바위가 있다. 그리 높지 않은 바위인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게 바위와 친해지라고 손 잡아 올려준 친구 덕분에 인증숏을 찍었다. 왜 때문에 등산객들은 바위만 보면 본능적으로 올라가는 걸까. 나는 바위 포비아가 있어서 늘 구경꾼이었는데 듬직한 친구들이 손을 잡아줘서 포비아를 조금씩 극복하는 중이다. 하지만 위에 올라가면 다리를 꼿꼿하게 펼 수 없어서 엉거주춤 서서 구경거리가 되어버리는 비애.


공포는 노출과 경험 부족에서 나온다. 처음 트레킹을 할 때, 오솔길도 걸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순하디 순한 오솔길도 무서웠다. 오른발을 앞에 두면 왼발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넘어질 것처럼 건들건들하며 걷는 것처럼 걷곤 했다. 지금도 두려움이 앞서면 몸이 움츠러들고, 근육이 경직되면서 엉거주춤하게 걷지만 천천히, 바위, 숲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길을 만나다 보면 공포와 두려움은 조금씩 걷힐 것이다.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내 속도대로 가면 된다. 앞지르는 사람, 목소리 큰 사람의 기에 휘둘리지 않고 걷다 보면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풍경이 짠-하고 나타난다.



풀밭 위에 작은 나무들이 모두 철쭉인데 지난주에야 만개했다가 졌다고 한다. 비로봉에서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만들어낸 풍경에 풍덩 빠져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는데 빠져나올 의지가 그닥 안 생긴다. 이러다 또 소백산 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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