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공모전
올해 코로나바이러스가 지구를 습격했다. 때맞춰(?) 나는 백수가 되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백수로 한 해를 보내기로 했다. 백수의 사전적 의미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건달’이다. ‘일’을 경제활동으로만 해석하는 사회의 인식을 보여주는 정의이다. 자발적 백수든 비자발적 백수든, 백수는 질풍노도기로 의기소침하고 표면적으로 빈둥거릴지 몰라도 내면은 불안의 파도에 올라타서 무척 분주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해서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실행되었던 봄에 자발적 격리로 들어가 칩거했다. 이 달갑지 않은 바이러스가 언제 끝날지, 아침마다 CNN에서 생중계하는 백악관 태스크 포스의 브리핑까지 챙겨보느라 힘들었다. 유럽과 미국이 바이러스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사회에 속한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이러스 발생 이전과 같은 생활로 못 돌아간다는 말에 체념하고, 잔뜩 웅크린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출근하지 않는 삶이 주는 즐거움이 있지만 뭉텅뭉텅 줄어드는 통장 잔고와 ‘나’라는 인간의 가치 효용성에 대한 고찰로 은근한 불안을 품고 있다. 백세 시대에 진로 모색을 위해 몇 개의 강좌를 신청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다 취소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긴 장마가 이어지는 여름이 시작되어 다시 행동반경이 위축되면서 마음도 쪼그라들었다. 코로나 블루와 장마 블루의 문턱을 넘을 찰나에 애초의 의도와는 약간 다른 방향의 강의들이 개강하면서 비대면이 일상이 되었다.
가장 먼저 개강한 강좌는 마음을 다루는 심리학 수업이다. 강의자들도 수강생들도 비대면 수업은 처음이었다. 낯선 화상 회의앱으로 상호작용 수업이 가능할지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하는 대면 수업에 익숙한 교수들은 수강생들과 화상으로 실시간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개강 첫날에 혼란의 쓰나미가 몰아쳤다. 마이크를 켜자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더불어 생활 잡음이 더 생생하게 중계되었다. 화면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잘 들리는지 확인하느라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모니터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얼굴을 향해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계속 확인했다. 첫 시간은 강의자도 수강자도 비대면 소통이라는 낯선 방식에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첫 수업의 어수선함이 지난 후 양방향 수업과 일방향 수업을 투표에 부쳐, 일방향 수업으로 전환해서 강의자 이외의 마이크에서 나오는 소음을 제거하는 것으로 혼란을 마무리했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비대면 독서 토론 수업은 양방향 수업으로 이루어졌다. 각자의 발언 차례가 오면 마이크를 켜고 이야기한다. 이 간단한 행동 속에는 무언의 약속이 있다. 모니터 너머에 살과 피가 흐르는 심장을 지닌 이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직접 대면하는 것은 기계와 벽이다. 한참 동안 말하다 보면 그들이 여전히 거기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희미해진다. 문득 허공을 향한 외침이 아닐까 하는 불안으로 서둘러 발언을 마무리하곤 한다. 형식적으로 꽤 안정적이지만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빛과 표정을 직접 볼 수 없는 소통은 가톨릭 사제와 신자 사이에 가림막을 두고 하는 고해성사 같다.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 대해 자책을 하기도 하고, 나를 너무 드러냈다는 경계심도 생겨서 당최 개운하지 않은 여운을 혼자 곱씹곤 한다.
비교적 연령층이 높은 수강생들과 함께 듣는 PPT 강좌는 시작 전부터 대혼란이었다. 수업 일주일 전부터 각종 공지사항이 넘쳤다. 화상 회의앱을 못 사용해서 수업에서 이탈하는 사람을 막으려는 살뜰한 노력이 고맙지만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 같았다. 수업 내용이 아니라 수업 도구를 마치 정복해야 할 과제처럼 다루는 것 같았다. 수업 전의 노력 덕분인지 첫 수업은 성황리(?)에 마쳤고, 안정된 궤도에 올랐다.
강의 시간에 모두 제대로 접속하려면 회의방이 개설되기 전에 공지사항을 공유하는 소통 창구가 필요했다. 화상 미팅앱은 강좌가 열리는 기관에 따라 줌, 리모트 미팅, 웹엑스 등 각각 달랐지만 수업 전후 소통 채널은 국민 채팅앱인 카카오톡 하나로 수렴되었다. 휴대전화는 단체 톡방에서 뜬 메시지의 홍수에 잠겼다. 수업 전과 후에 꼭 필요한 정보성 메시지들이었다. 글로 전달된 메시지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시차가 발생했다. 발신자는 한 명이지만 수신자는 수 십 명이라 하나의 메시지에 대해 오독이 발생하고, 다른 메시지들에 밀려 필요한 메시지를 읽지 않고 넘어가는 위험이 산재했다. 각자 다른 시간에 공지한 내용을 확인한 수강생들은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묻고, 묻고, 또 물었다. 반복된 질문에 대한 답은 회의방 개설 담당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낯선 이들 수십 명이 모인 단체 톡방에서 정서적 교류는 전혀 없이 기능적 대화가 오고 갔다. 다행히 수업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강사들도 수강생들도 적응이 되어 메시지 소음이었던 질문과 답 톡이 서서히 잦아들고, 한 달이 지나니까 고요해졌다.
유난히 장마가 길었던 올여름, 어떤 날에는 폭우를 뚫고 강의실까지 가야 하는 수고가 필요 없어서 비대면 수업에 미소를 짓다가, 강의가 시작되면 다시 모니터와 나만 마주하는 세계로 들어가 고립된 기분이 들곤 했다. 코로나가 물러갈 때까지 꽤 오랫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는 계속될 것이다. 비대면 수업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대면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온기가 빠진 배움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까? 앎은 결국 관계 속에서 녹여내야 의미 있지 않을까? 수업이 끝나면, 화상 회의방을 나오며 접속 종료와 동시에 사라지는 세계에서 배움은 어떤 역할을 할까?
<호모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거의 모든 직업이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로 유발 하라리의 예측이 가시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 AI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고 인간이 잉여 산물로 남는 날이 올까? 노동 시장에서 ‘강제 해방’된 인간에게 정서는 더욱 큰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비대면 시대에 정서는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인간이 기능성 언어만 사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정서적 교감을 가장 많이 나누고 안정을 주는 친구들과 지인들과 사적 만남을 자제하면서 고립감과 고독을 극복할 수 있을까? 비대면 방식과 AI가 과연 정서적 고립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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