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독일 여행기
로텐부르크는 로맨틱 가도에 있는 중세 도시이다. 매일 뮌헨 중앙역에서 로텐부르크로 출발하는 로컬 투어 버스가 몇 대씩 있고, 가차 타고 개별적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독일에서 가장 아기자기한 도시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 말은 역으로 로텐부르크는 가장 독일스럽지 않은 도시란 말도 된다. 나도 출발 전에 여러 도시 자료를 찾다가 로텐부르크는 꼭 가야 하는 도시로 낙점하고,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직접 본 로텐부르크는 관광객을 위한 테마파크 같은 도시였다. 로텐부르크 성벽 밖에 있는 주차장에 내렸다. 안으로 통하는 아치 문을 통과하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1964년작 <피노키오>의 배경 도시라는 걸 공식 관광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알았다. 한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면 그 도시는 불멸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 같다. 64년작 <피노키오>는 거의 기억이 안 나지만 '피노키오'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 것이다. 피노키오와 로텐부르크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해도 피노키오를 아는 것만으로 로텐부르크는 살아 숨쉬며 관광객에게 다가온다. 한 나라나 도시가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가 혹은 예술작품을 갖는 것은 지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반짝이는 별을 심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성벽 안으로 몇 걸음만 내딛으면 과거 건축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방부제 도시'에 입성하게 된다. 그 옛날, 다른 나라의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시대에도 세계의 마을을 이루는 원칙(?)은 참 비슷해서 놀라게 된다. 과거 한양의 모습은 이랬다. 궁을 중심으로 사대문이 세워졌고, 사대문 안에 궁에 출퇴근하는 관리들이 모여사는 양반촌이 생겼다. 사람이 모여 살면 필요한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양반이 모여 사는 곳을 중심으로 양반의 필수품과 잉여품을 납품(?)하며 살아가는 서민촌이 생겼다. 한양이 도시로 기능한 원리인데 서양의 도시도 비슷하다. 기업이 들어서는 곳에 직장인이 모여 살게 되고, 그에 따라 상권이 발달하는 오늘날의 부동산 지형과도 비슷하다는 의외의 깨달음! 로텐부르크도 시청을 중심으로 식당과 상점가가 발달했고, 골목 사이에는 집들이 묵묵하게 자리를 지킨다.
오전에 뿌렸던 빗줄기가 물러가고 파란 하늘과 풍부한 햇살이 거리 곳곳에 내려앉았다. 빛을 받는 곳은 눈이 부시게 반짝이고, 빛에서 소외된 곳에서는 근사한 그림자를 볼 수 있어서 '흥 게이지'가 만땅으로 차 올랐다. 로텐부르크를 둘러보는 시작점은 시계탑에서 시작한다. 몇 가지 역사적 설명을 들었지만 내 머릿속에 강력한 지우개가 있어서...
로텐부르크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삼각형 모양의 박공인 게이블gables이다. 게이블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빨강머리 앤>인데. 원제는 <초록 게이블지붕의 앤 Ann of Green Gables>이다. 게이블지붕이 떼로 모여있어서 내가 동화 마을로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다. 게이블지붕 아래에 사랑스러운 앤은 물론 없었고, 대신 블링블링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 수보다 마켓 상점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대부분 일상과 상관없는 잉여 물건들이다. 집에 돌아가면 로텐부르크에 대한 기억이 휘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상품들이었다.
조금 아이러니했던 건 입구에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 안내판이 쓰여있다. 이 말인즉 세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 격하게 애정 하는 도시란 뜻이다. 나는 다양한 서양식 크리스마스 장식용품에 거리감을 느낀다. 장식을 위한 장식품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구매욕이 일어나진 않는다. 무용한 것의 쓸모는 무용함, 그 자체에 있는데 이는 어른에게 시한부로 허락된 동심이 아닐까. 일상에서 쓸모없는 각종 물건에 어른은 신중한데 이국적 도시의 크리스마스 상점에서 마음의 자물쇠를 푸는 것이 여행일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색인 빨강과 녹색으로 만들어진 인형들은 화려해서 눈길을 단번에 잡아끌었지만 꽤 고가였다. 동심을 잊고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사람이 정서적 충만함을 느끼는데는 쓸모없는 것이 필요하다. 잉여 짓들로 채우는 시간이 없다면 세포는 다 말라서 조그만 마찰에도 부서져버릴 것이다. 로텐부르크의 비현실성은 크고 작은 사회적 마찰을 버티게 하는 힘을 주는 도시 같았다.
눈 부신 햇살 속을 사뿐사뿐 걸어서 목조 성벽의 또 다른 끝에 다다랐다. 성벽을 따라 투어도 있다는데 허락된 시간이 없어서 내 두 발과 두 눈으로 로텐부르크를 다 담으려고 애를 썼다. 물론 부질없는 짓이지만. 저 목조 다리를 쭈욱 따라 올라가서 한 바퀴 돌아서 내려와서 성벽을 나가면 정원이 펼쳐진다.
여행기를 쓸 때 사진을 추리는 일은 글 쓰는 일보다 어렵지만 즐겁다. 사진첩을 뒤적이면서 그날의 감상에 젖기도 하고, 당시에는 별 감흥 없던 것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사진은 기억을 소환할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기념품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세포 곳곳에 그날 불었던 바람의 감촉, 눈에 들어왔던 햇살의 강도,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걸으며 신발 아래에 닿았던 포석의 느낌 등을 떠올려 보는 것, 그러면서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가 그 계획을 모조리 허물기도 하면서 나만의 기억의 성을 쌓는다.
이 되새김질하는 시간이야말로 내게는 여행의 참맛이다. 여행은 순간이지만 되새김질은 사진과 글로 남겨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기억은 왜곡이라고 했다. 사진을 보면 힘들었던 순간은 희석되어 즐거웠던 순간만 남아서 또 떠나고 싶은 충동 감각만이 자극된다. 지난 사랑처럼 사랑의 고통은 증발하고 기억으로 화석화된 사랑의 기쁨 때문에 새로운 사랑을 다시 갈망하는 것처럼. 사진 속에 한때 내가 있었지... 아쉽고도 아쉬운 시간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