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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네모펀치 Nov 19. 2019

곁눈질한 죽음들

나는 죽음 앞에서 어떤 마음이었나


  대학을 다니면서 무수한 죽음을 봤다. 역시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또래의 죽음이다. 구의역의 김군, 자살한 콜센터 직원, 이한빛 피디... 그러나 이제 와서보니 내가 진실로 그들의 죽음을 들여다봤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좀 더 진중했어야 했다. 운동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도 1990년대도 아닌 2010년의 중반에, 심지어 학생운동이 도대체 뭔지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운동을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 열을 올렸다. 지금은 다시 나에게 묻는다. 정작 스스로를 충분히 설득하였냐고.


인생은 제로섬게임이라 모든 걸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하지만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스스로 속도를 조절할 수 없을만큼 내가 빠르게 가려고 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기획하고 실행한 모든 활동에 내가 없었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어디로 가야하고 어떻게 도약해야하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조금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운동을 한다는 겉멋만 들어 알맹이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정리되지 않은 고민과 마음을 수습하지 못할 때면 동료를 붙잡았다. 언제나 그들은 그들의 최선을 다해 들어주고 조언해주었지만 그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의 깊이와 나의 깊이는 언제나 달랐고 나는 더 파고 내려가지 못했으므로.


오랜 꿈이었던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다시 검색해보았다. 연관 검색어로 그 직업의 연봉, 복지, 현실이 뜬다. 내가 하고 싶은 대부분의 직업은 건강을 담보로 잡는 것도 모자라 매우 낮은 돈을 받고 해야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막상 일을 하게 되면 실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깨닫게 되겠지. 아직도 이름을 잊을 수 없는 故 최고은 영화감독과 故 이한빛PD가 어쩌면 어렴풋이 느꼈을지도 모를 그런 감정을 말이다.



제일 두려운 존재이자 가장 강렬한 욕망


엄마는 나를 애지중지 기르려 노력하셨다. 최대한 세상의 고단함을 피해가도록 키우고 싶어하셨다. 정말 피해가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그렇게 가난한 집 기준으로는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AI가 사람을 대체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판에 무슨 신파적인 가난 이야기냐 할지 모르겠지만 내 가치관과 정체성을 형성한 가장 큰 요소는 어릴 적 가난이다. 화장실도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집이 떠오른다. 그 나이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커갈수록 가난은 나에게 실체적인 고통이 되었다. 꿈을 쫓는다기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공부를 했다. 10대의 내 세상에서는 공부가 전부였기 때문에 공부만 잘 하면 돈이 따라오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어 돈을 벌어야 겠다는 구체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 최고은 씨가 죽었다. 사인은 아사였다. 2011년,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굶어죽었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다.


공부는 노력한 만큼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다. 최소한 나에게는. 공부한 만큼 결과가 나왔고, 항상 기대하는 성적을 받았다. 노력을 덜 하면 덜 한만큼 받았다. 완벽하게 공부했는데 억울한 점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회는 공부랑은 다르다. 결과가 노력에 비례해서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이 이름을 댈 수 있는 영화감독이 몇이나 되는가? 열 손가락을 다 세지 못할 것이다.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리는 직업이다. 무섭고 겁이 났다. 나에게 제 1의 꿈은 돈을 마음껏 쓸 수 있을 만큼 돈을 많이 버는 것인데. 나는 더 안정적인 방향을, 제 1의 꿈에 더 가까운 길을 선택했다. 예술대학이 아닌 평범한 사립대에 진학하는 것.



나를 부정해야하는 순간, 취준


나는 정말 어릴 때,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모르던 시절부터 막연히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아주 속물적이고 원초적으로 생각한다면, 아마 가난에 대한 증오와 돈에 대한 욕망에서 출발했지 않았나 싶다. 신기하게도 운명처럼, 대학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우연히 사회문제를 공부하는 공간을 만났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공부를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 1의 꿈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있었다.


부랴부랴 진로를 바꿨을 때는 내가 봤던 무수한 죽음을 끝내 외면하고야 마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었다. 취업 시장에서는 내가 공부하고 실행했던 많은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나는 계속 후회했다. 그리고 후회하는 날이면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대학생활을 통째로 쏟아부으면서 왜 활동을 했을까? 그리고 그 개죽음들을 보면서 내가 진짜 한 생각은 뭐였을까? 사실 슬픔과 분노보다는 나는 저렇게 되면 안된다는 두려움이 아니었나? 완전히 동조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한 채 곁눈질로 보며 지나왔던 것은 아닐까. 이제는 그 힘든 마음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벗어날수록 나를 잃은 기분이 느껴진다. 그리고 어렴풋이 느낀다. 이것이 내 무기력함의 원천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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