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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모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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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네모펀치 Feb 08. 2021

[모녀전쟁] #1. 죽고 싶은거야 죽이고 싶은거야?

여전히 엄마를 사랑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도 존재하겠지

네모씨는 엄마를 죽이고 싶은 거네요. 엄마를 죽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본인이 죽고 싶은 것 아니에요?


처음으로 간 정신과에서 의사가 한 말이다. 두꺼운 안경 너머 의사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내 뒤쪽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시가 있는 것 같았다. 옅게 웃으며 기계적인 친절함을 띄는 의사가 조금 기괴했다. 긴장했다. 들킨 것 같았다.


나는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지나치게 감정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다. 단지 보통 사람보다 자주 우울해하고 너무 쉽게 무기력해하는 사람일 뿐이다. 엄마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어서 죽고싶다고 했을 뿐인데 그 의사는 귀신같이 내 속마음을 안다.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이 듦과 동시에 해방감이 든다. 그런 패륜적인 생각을 하다니, 미쳤어, 하면서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 고통에 대해 풀어 놓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 나지 않는다. 그냥 30분 동안 울면서 웅얼거렸다. 그랬더니 조그만 알약을 처방해줬다. 약국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병원 데스크에서 제조해줬다.


기뻤다. 이 약을 먹으면 힘들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겠지? 자기연민과 자학과 슬픔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앞을 보고 달릴 수 있겠지? 내 상태가 좋아지면 엄마 이야기도 더 잘 들어줄 수 있을지 몰라. 나에겐 다른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에 약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약의 효험은 알 수 없었다. 정신과 약을 처방받은 걸 안 엄마는 그런 약을 먹으면 건강을 더 해친다고 했다. 우울증은 그런 걸 먹는다고 낫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나는 약을 몽땅 버렸다.


엄마 몰래 심리상담을 받고 있었다. 받고 나면 그래도 힘이 났다. 상담 내내 우느라 상담이 끝나면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의욕이 생겼다. 엄마도 상담을 받으면 우리 관계가 좀 좋아지지 않을까? 엄마에게도 상담을 권했다. 엄마는 상담을 거부했다. 우리 둘 사이의 문제인데 그걸 남한테 이야기해서 무엇이 풀리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엄마 말을 잘 못 들어주니까 상담하면서 응어리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엄마는 모르는 사람한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싫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리곤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상담을 받으러 가느냐고, 엄마랑 관계는 엄마랑 풀어야지 상담사한테 가서 이야기하면 뭐가 나아지느냐, 그래 상담을 받아서 나랑 관계가 좋아진 것 같으냐! 엄마는 내 고집에 몇 번 상담을 가다가 금방 그만 뒀다.


어떤 해결책도 거부당했다(고 느꼈다). 노력했지만 내가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는 내가 한 노력들은 무시하고 못한 것만 기억했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노력을 안 한걸지도 모른다. 엄마는 기분이 상할 때마다 무한히 반복해서 말했다. 네가 그 때 도와만 줬어도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텐데. 그 때 내가 힘든 걸 알면서 그렇게 했니? 나는 너보다 더 힘들게 살았다. 그것가지고 힘들다고 하지 말아라.


처음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엄마는 별로 안 좋아했다. 시간 날 때마다 남자친구와 놀러다닌다고 싫어했다. 그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엄마한테 조금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는 너는 겨우 남자친구랑 헤어진 것도 그렇게 슬픈데 남편이랑 이혼한 나는 얼마나 슬펐겠냐고 했다. 사실 남자친구와의 이별이 그렇게 슬프진 않았지만 엄마랑 이런 저런 이야기하며 친해지려고 말을 걸었는데 금방 후회했다. 다음에 두 번째 남자친구 이야기를 꿋꿋이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계속 만났지만, 만나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마라, 해라, 너는 왜 말을 안 듣니? 너처럼 말을 안 듣는 자식은 없을 거다.


나이를 몇 살이나 먹든 내가 얼마나 잘하든 못하든 이 말은 영원히 날 따라다닐 거라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랬더니 정말로 죽고 싶어졌다.


웃긴 건 엄마가 이런 말을 하는 상대는 오로지 나뿐이라는 거다. 동생에겐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동생한테 할 말도 나한테 한다. 세모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엄마 말을 전혀 안 듣지. 하여간 너네는 똑같아, 아빠를 닮았는지.


동생은 엄마 말을 어릴 때부터 잘 듣지 않았고 나는 비교적 잘 듣는 자식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 정신을 파먹으면서도 엄마 옆에 지금까지 붙어있는 건 내가 엄마를 죽이고 싶어하는 착한 딸이라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제 벗어나려고 한다. 내가 죽는 건 벗어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만, 그래도 조금 복잡한 방법으로 벗어나려고 한다. 나같은 딸들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힘이 되고 그들이 나에게 힘을 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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