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중독적인 걷(기)!
올해도 바쁜 회사 일정에 개인 일정을 맞추느라 모두가 까무잡잡하게 복귀한 후, 나는 비수기에 늦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해외여행은 알아볼 시간이 빠듯하고, 그래도 비행기는 타줘야 여행 느낌이 날 것 같아 제주도를 선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맛있고 멋지고 여유로운 힐링 컨셉이었다.
바닷가에 누워 마음껏 책을 보며 힐링할 생각이었지만 일주일 전까지도 새로고침한 일기예보에는 역시나 태풍과 비 그림만 가득했다. 뷰 좋은 맛집과 카페를 찾아보니 오히려 선택지가 너무 많아 선택장애가 왔다. 그때 보인 제주 올레 후기. 올레! 어차피 혼자 가는 여행이니 일단 제주시 근처 코스를 하나 걷다가 뷰가 멋진 카페에 들어가면 되겠군. 그렇게 가장 짧은 정규 코스, 올레 21코스가 나의 제주도 여행의 야심차고 유일한 계획이 되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의 첫 제주도 혼자 여행이 처음부터 끝까지 7일간 100km 올레길을 걷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일주일 동안 제주도 세화, 서귀포, 모슬포, 금능, 협재, 애월을 돌며 총 8개의 올레코스를 완걷했다. 서울행 비행기에서 계산해 보니 코스 길이로만 109.6km. 첫째 날 21일 코스를 걷고 생각보다 즐거워 하나는 아쉬우니 둘째 날 7번 코스 하나만 더 걸어보자는 마음이었는데, 셋째 날 올레 코스 두 개를 걷고 싶어 아침 일찍 시작을 위해 숙소 조식도 포기해 버렸다. 그렇게 매일, 무엇에 홀린 듯, 마치 수술 후 기적적으로 다리를 얻은 사람처럼 일단 그냥 걸었다.
나라는 사람은 집에서 3분이면 지하철 역이 있는데도 그 3분이 귀찮아 매일 차로 출퇴근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걷기란 그저 이동 방법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느린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시간은 금인데, 차라리 따릉이를 타지. 운동이 목적이라면 30분 걸어 100 칼로리 뺄 바에야, 30분 힘들게 300 칼로리 빼야지 주의라서 PT도 만족하지 못하고 45분 고강도 운동인 프사오를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1년에 한 번 있는 여름휴가 동안 걷기만 했다. 그것도 제주도까지 갔는데. 심지어 역시나 일기예보는 빗나가 일주일 내내 해 쨍쨍 30도 날씨 속에서 그냥 걸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다음 일정으로 해파랑길 걷기를 계획 중이다. 도대체 왜? 다이어트? 자연 풍경? 나도 아직은 정확히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걷고 난 후 나의 기분과 태도는 변화가 있었고 그 느낌은 중독적이라는 것이다. 이 기분 나쁘지 않은 중독됨과 기분 좋은 피곤함을, 내가 그랬듯 우연히 이 글을 본 한 분도 느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에게로 걸어가는 여행을 한 걸음씩 기록해 볼까 한다.
- 나에게로 걸어가고 있는 평범한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