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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네 Oct 24. 2023

어차피 할 거잖아요

[올레 1] 21코스 세화

제주도 여행 첫 아침, 오늘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전 날, 덕분에 10년 만에 무지개를 봤다며 비에게 고마워했던 나는 어디 가고, 나의 첫 올레 걷기 도전을 망설이게 만드는 비가 얄미웠다. 문 앞에서 우비를 집었다 놨다 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보고 계시던 분의 뼈 때리는 한 마디.

“어차피 할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오늘 나의 유일한 제주도 일정은 ‘올레 코스 걸으면서 카페 찾기’였기 때문에 따로 가고 싶은 곳도 없었고, 다시 계획을 세우기도 귀찮았다. 일단 나가보자. 터벅터벅.



아침 8시, 제주해녀박물관 앞 올레 21코스 공식안내소 입장!

비도 오고 첫 올레이다 보니 혼자 걸어도 괜찮을지 물어보기 위해 들어갔는데 파란 바다색의 올레 패스포트가 나를 반겼다. ‘한 코스만 걸어도 기념품은 필수지~’라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직원분께서 오늘 첫 손님이 생애 첫 올레 패스포트를 산다고 하니 너무 축하한다며 내가 패스포트에 사인하는 모습, 출발 스탬프를 찍는 모습 등 기념사진을 마구 찍어주셨다. 마치 출생신고서를 적을 때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하게 축하해 주셔서 이미 완주한 느낌이었다. ^^; (진짜 완주하고 꼭 다시 그분께 완주증을 받고 싶다.) 덕분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외쳤다.

“비가 오든 말든 완주는 꼭 할게요!”

8시 10분, 첫 올레코스를 시작했다. 터벅터벅

완주 후에 꼭 이 사진작가(?!) 직원분께 완주증을 받고 싶다!

올레 21코스는 하도~종달 11.3km의 올레 공식 코스 중 가장 짧은 코스이자 마지막 피날레 코스이다. (왜 마지막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이 놈의 지미봉…)


해녀박물관을 지나 바로 해안가를 걸을 줄 알았는데 ‘낯물밭길’이라 불리는 어느 마을로 들어갔다. 마치 쥬라기공원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까만 흙을 뚫고 피어난 노란 꽃들, 주위를 에워싼 각양각색의 나무들, 그리고 병풍처럼 펼쳐진 녹색의 화산들. 그 사이 현무암 담벼락을 따라가다 보니 순식간에 중간 스탬프 지점 ‘석다원’에 도달했다. (석다원이라길래 무슨 공원인 줄 알았는데 그냥 중국집 이름이었다…) 한 시간 만에 마주한 바다가 괜히 반가워 저 멀리 보이는 ‘토끼섬’을 향해 깡충깡충 해안도로를 뛰어갔다. (토끼섬은 왜 토끼섬인지 한참을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무리 봐도 토끼는 안 보였다. 착한 사람한테만 보이는 건가?)

그리고 곧 21코스 중 가장 예뻤던 ‘하도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작은 해변인데 뒤에는 야자수와 소나무가, 앞에는 푸른 잔디밭이 있어 동남아와 한국, 유럽 느낌을 아주 조금씩 모아 놓은 듯했다. 날씨가 좋을 때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여기까지는 해도 비도 없어 즐겁게 걸었다.

중국집이 왜 중간스탬프 구역일까? 예쁜 하도해변도 있는데

그리고 ‘지미봉’을 마주했다. 165M 밖에 안 되는 이 녀석, 결론부터 말하면 정말 너무 가파르고 힘들었다. 안내소 분이 원래 올라가는 길은 공사 중이라며 다른 길을 알려 주셨는데 그 길은 가파르니 꼭 안 올라가도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번 올레가 처음이자 마지막 올레였기 때문에 오름은 한 번 찍고 볼 생각이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10분 같은 1분 정도 올라갔을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두 걸음 내려가고 싶었다. 사람도 없고 정상도 보이지 않으니 가파른 높이만큼 숨이 가빠지면서 무섭기까지 했다. 그때 앞에 보이는 세 분의 아저씨들! 나 같은 초짜 등산인을 위해 얼른 올레 길을 공사하러 가시는 길이신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사람이 보이니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공사 중이라 힘든 길로 왔는데 공사 아저씨들이 반가운 아이러니. 여하튼 그분들 꽁무니만 따라 겨우겨우 정상에 올라갔다. (나 혼자) 너무 감사해서 정상에 올라가자마자 큰 용기를 내어 말을 건다는 게

“안녕하세요, 혹시 저게 한라산인가요? “

내 뇌가 털털 털린거린 것처럼 털털털 웃으시며 무슨 동네 산이라고 하셨다. 동네 산을 가리키며 한라산이냐니… 진짜 무식해 보였을 것이다. 민망함에 빠르게 하산하고 싶었으나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보이는 지미봉 정상 뷰가 너무 멋졌다. 행복했다. 멋진 경관을 봐서 행복한 것도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정상까지 올라왔다는 성취감에 찐으로 행복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게 한라산인가요?” 털털털

11시 50분, 출발 3시간 40분 만에 종점 ‘종달바당’에 도착했다. 올레!

유유히 해안가를 걸으며 뷰 좋은 카페를 발견하려고 했던 나의 목적은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대신 뜻밖의 감정들을 느꼈다. 새삼 사람의 존재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아름다운 것보다 힘든 것이 준 묵직한 행복함. ‘만약 완만한 길로 지미봉을 올라갔다면 정상에서 그만큼 행복했을까?’ ‘나에게 행복의 조건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달려있나?’ 카페를 찾아 시작된 올레길이었는데 이 질문을 시작으로 이후 올레 코스를 걸으면서 ‘나의 행복’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 지금도 올레 21코스하면 예쁜 하도 해수욕장보다 힘들었던 지미봉이 더 기억에 남는다.

애증의 지미봉. 멋지고 힘들고 그래 너 다해라~

숙소로 되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20분 만에 도착했다. 걸어서 4시간 걸린 거리였는데…

허무할 틈도 없이 나는 오후에 걸을 수 있는 올레코스를 부랴부랴 검색했다. 뜻밖의 묵직한 행복을 느껴버려 한 개는 조금 아쉬웠다. ’ 비도 안 오는데, 올레길 하나만 더 걸어보고 나머지 5일은 해변에서 놀자!‘ 그렇게 나는 올레 7코스를 걷기 위해 급 서귀포로 향했다. 좀 피곤했지만 “어차피 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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