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네네 Oct 27. 2023

자유로운 외로움 속에서 일단 그냥 걸어본다

[올레 2] 7코스 서귀포

아침 8시, 어제 인생 첫 올레인 21코스를 걸으며 느낀 묵직함 행복함은 어디 가고 묵직한 뻐근함에 잠이 깼다. (부랴부랴 7코스를 걷기 위해 서귀포로 왔지만, 결국 배고픔이 승리하여 고등어회로 올레 종료를 축하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


급하게 잡은 서귀포 시내 게스트하우스의 아침은 의외로 분주했다. 토스트 3개를 쌓아 피자처럼 먹는 젊은 학생, 어젯밤 내리다만 빗방울이 아직 먹구름에 갇혀있는 것 같은데 빨래를 널고 있는 용자, 뒷모습은 넷플릭스 배우인데 앞은 넷플릭스에 흠뻑 심취해 있는 외국인. 각자의 방식대로 하루를 시작하는 다채로운 광경을 보니 오늘은 그냥 뒹굴거릴까 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먹던 땅콩버터 토스트를 입에 물고 일단 그냥 나왔다. 그리고 9시 10분, 어느새 올레 7코스 스탬프를 찍고 있었다. OMG.



올레 7코스는 서귀포 여행자센터 ~ 월평까지 이어지는 17.6km의 5~6시간 코스로 가장 많이 찾는 올레길 중 하나라고 한다. 찾는 사람은 많았겠지만, 끝낸 사람도 그만큼 많을지 의문이다. (중반 이후부터는 내가 이 구역의 외돌개가 된 기분이었다.)


가장 유명한 지점인 ‘외돌개’까지는 약 1시간 반거리로 두 개의 공원을 가로지르게 되는데, 첫 번째로 지나가는 칠십리공원에는 ‘천지연 폭포’를 바라볼 수 있는 나름의 명당이 있다. 걷기를 시작한 지 30분 만에 마주한 폭포 앞에는 <마지막 황홀>이라는 짧은 글이 쓰여 있었다. 폭포를 ‘모으고 모아 힘찬 포효를 마음껏 발산하는 마지막 황홀‘이라고 표현하다니.

‘지금 나는 폭포는 아닌 것 같고… 저수지인가? 강인가? 앗, 진흙탕은 아니겠지?!’

마지막 황홀을 볼 수 있는 명당자리!

결론 없는 사색을 하다 보니 두 번째 공원인 ‘삼매봉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꼭대기 정자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노인성(별)의 시가 동서남북 걸려있었다. (정자에서 노인성을 볼 수 있었다는데, 별 덕분에 오래 산 게 아니라 별을 보기 위해 공원 꼭대기까지 매일 올라가다 보면 당연히 오래 살지 않았을까 하는 T의 의문...)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목적이었구나 싶으면서도 ‘나는 짧더라도 굵게 살고 싶은데!’라는 배부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짧게.


공원을 내려오니 곧바로 목적지 ‘외돌개’ 산책코스 출입구가 보였다. 조금 걷다보니 정말 외로워 보이는 멍멍이 상의 돌이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이토록 외로워 보일 수 있다니. 살짝 내 상황 같기도 했다. 남들이 보면 괜찮은 위치, 괜찮은 상황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나 스스로 괜찮다고 세뇌시켰고, 그러다 보니 내가 나 자신에게 외로움을 느끼는 멜랑꼴리 한 상황.


잠시 뒤 각국의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내 뒤에 서있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일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외돌개가 아까보다 훨씬 더 외로워 보여 슬프다가도, 끝없는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는 그 모습이 자유로워 보여 부럽기도 했다. 돌을 보며 ‘자유와 외로움’의 아이러니함을 고민하다니 ‘나 요새 좀 힘들구나ㅠ’라며 올해 들어 처음으로 내가 나의 힘듦을 진짜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시기에 일단 그냥 제주도에 오기로 해서 정말 참 다행이다 생각이 들었다.

자유와 외로움의 사이. 위에 머리털까지 진짜 강아지 같은 외돌개

예상했겠지만 원래 계획은 외돌개까지 걷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면 힘듦이 마지막 감정이 되어 다시 우울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그냥 좀 더 걷기로 했다. 터벅터벅.



그 이후의 올레 7코스는 게스트하우스의 아침보다 다채로웠다. 바다를 보며 걷는 ‘돔베낭길’을 지나 모래길 ‘속골’을 거치면 올레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자연생태길이라고 쓰여있는 ‘수봉로’가 나온다. 삽과 곡괭이로만 만든 길이라 그런지 짧은 시간 동안 아무 고민도 생각나지 않는 곳이었다. (강력추천!) 이후엔 해안 수영장이 있는 ‘법환포구’ 주변 범섬을 바라보며 걷는 무한 돌길이 펼쳐진다. 자유와 외로움 사이 고민했던 나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셀카 찍고, 발 담그고, 밥 먹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했다. (이런 고민은 회사에서만 적용되나 보다.)

아무 걱정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유를 만끽하다!

출발한 지 4시간 만에 드디어 ‘올레요 7 쉼터’ 중간 지점에 도착했다. 아직 중간지점이라니… 날씨는 30도를 넘어 빗줄기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정말 포기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포기할지도 몰랐다. 이제 내 다리는 일단 그냥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가 마비되면서 뇌도 마비되었나 보다. 마지막 한 시간 동안은 몇 번을 길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맨 처음 길을 잘못 들었을 때는 덜컥 겁이 났다. 나 미아 되면 어떡하지? 그다음 또 잘못 들었을 땐 투덜거렸지만 왔던 길은 뚫려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갔고, 세 번째 잘못 들었을 땐 이 길도 어느 길로 연결되겠지 하고 그냥 걸었다. 그러다 또 길을 잃었을 땐 너무 힘들어서 그냥 가로질러 갈 수 있는 덩굴이라도 없나 하고 두리번거렸다. 이래나 저래나 결국엔 드디어 종점 ‘월평 아왜낭목 쉼터’에 도착했다! 출발 5시간 30분 만의 여정 - 장담컨대 태어나서 제일 오래 걸은 시간이다.

4시간만에 중간스탬프라니, 다리도 마음도 부들부들. 혼이 쏙 빠져 스탬프도 거꾸로 찍었다.

올레길의 이정표를 정확하게 따라가지 못해 좀 더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엔 종점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정표는 이정표일 뿐, 정답표는 아니었던 거다. ‘올레길의 이정표가 유일한 길이 아니듯이 세상살이 정답이 없지~’라며 세상 당연한 사실인데 대단한 것을 발견한 마냥 혼자 감동하고 신이 났다. (그냥 가거나, 돌아오거나, 새 길을 만들거나~ 흥얼흥얼)


그리고 나는 나의 인생 4자성어를 하나 정했다. 바로 “일단 그냥!” 생각이 많은 나는 항상 최고의 선택지를 고민했었는데 선택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오늘 몸소 체험했다. 앞으로는 고민 좀 그만하고, 일단 그냥 움직여보는 걸로.


내일은 뭐 하지? (또 고민하고 있다.) 올레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펼쳐보니 가파도에도 1~2시간 가장 짧은 올레 코스가 있었다! 그만 고민하고 내일도 일단 그냥 자유로운 외로움에 취해 조금만 걸어 보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걷기의 시작 100km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