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3] 10-1코스 가파도
제주도 여행 셋째 날,
어제 실수로(?) 5시간 반에 걸쳐 올레 7코스를 완주하고 저녁 일찍 뻗어버린 탓에 새벽 6시에 기상해 버렸다. 올해 들어 아무 목적 없이 이렇게 일찍 일어난 적은 처음이라 기분 좋은 당황스러움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이틀 만에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나를 신기해하며 이 역사적인 기분을 짧게 글로 기록하고 아침 로망의 쓰리콤보인 독서, 달리기, 스트레칭까지 해버렸다. 평소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것조차 불편해할 정도로 굳어 있는 나의 몸도 깜짝 놀랐나 보다. 제대로 쓰일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계속 움직여달라고 소리쳐댔다 (알고 보니 근육통^^;). 이에 맞춰 내 마음도 아침부터 가파도를 걷고 싶다고 아우성이었다.
내가 걷기를 위한 걷기를 하고 싶어 지다니…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빨리 죽는다던데… 걷는 거니까 오래 살려나?’ 이상한 아침에 이상한 생각만 자꾸 들어 얼른 짐을 싸고 나왔다. 그리고 오전 9시, 모슬포 운진항에서 가파도로 가는 가장 빠른 배를 타고 이번엔 조금 설레는 인생 3번째 올레길을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오늘 10-1과 10코스까지 총 7시간을 걸어버리면서 3일 만에 올레에 중독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10-1 가파도 올레 코스는 4.2km로 1~2시간의 아담한 코스지만 그 광경은 절대 아담하지 않다. 벽화가 있는 마을길을 시작으로 가오리를 닮아 가파도라 불리는 섬 전체를 뒤덮은 청보리밭, 그리고 해발 20m에서 바라보는 정말 동남아 부럽지 않은 360도 바다뷰까지, 모든 곳이 포토 스팟이었다.
이 섬에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바로 ‘가파 초등학교!’ 매년 한 명씩 졸업한다는 초등학교는 어떤 감성일까 너무 궁금했다. (이 와중에 나는 정말 일관적인 사람이었다. 가오리처럼 360도 장관을 정신없이 쳐다보다 오늘도 길을 잃었다. 어제 길을 잃고 ‘선택은 무용지물’이라는 합리화된 깨달음을 얻더니 오늘은 그 작은 가파도에서조차 길을 잃어 청포도 아이스크림 집만 세 번을 지나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먹은 내가 더 신기하다. 아침부터 정말 이상한 하루다).
배 출항 20분 전에 드디어 발견한 가파 초등학교는 생각보다 더 아담했다. 파란 잔디 위 레고를 조립한 것 마냥 올려진 1층 지붕의 건물, 그리고 덕분에 너무나 잘 보이는 하늘과 구름! 도시에서는 건물만 보지 하늘을 많이 안 보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낮은 건물 덕분에 높은 하늘이 보였다.
하늘만큼 커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가파 초등학교의 슬로건,
“큰 꿈을 키우는 행복한 학교”
아! 입이 벌어졌다. 하루 만보도 안 걷던 내가 왜 3일째 계속 걷고 있는지 실마리를 발견한 듯했다. 건강? 아니다. 올레길 완주? 설마.
지난 이틀 동안 내가 올레길을 걸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들, ‘꿈’ 그리고 ‘행복.’ 지금 내 현실은 불행하진 않지만 행복하진 않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겐 꿈이었을지도 모를 회사원의 꿈(?!)을 이루었으니 행복해지자라고 긍정 확언을 하자니 인생이 너무 평범해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더 노력하기엔 좀 지쳐있고 그러다 보니 조바심이 생겨 행복에서 멀어지고… 무한 굴레. 머리로는 변화를 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다 보니 한 마디로 그저 답답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이런 생각조차 회피하게 되었다. ‘행복하다고 말하면 행복해질 거야~’라는 순수한 마법을 기대하며 말이다.
그런데 이틀 동안 계속 걸으면서 그동안 반 강제로 미뤄왔던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움직이는 몸에 따라 뇌도 움직이는지 평소보다 생각의 폭도 넓어지고, 조바심도 나지 않았다. 생각하기 싫을 땐 주변 풍경으로 도피도 했다가, 갑자기 다시 생각나면 어차피 걷기밖에 없으니 그냥 생각나게 놔두고, 그러다가 첫날의 지미봉이나 둘째 날의 외돌개처럼 갑자기 현타도 왔다가, 그렇게 나는 이틀간 걷기만 했지만 걷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꿈 & 행복 찾기’라는 풀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적어도 내 의지와 정신력만으로도 100% 할 수 있는 걷기를 일단 하다 보니 무엇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시간과 시각의 여유로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힘으로 다시 어느새 생각하고, 무한 굴레.
왜 걷고 있는지 드디어 조금의 힌트를 얻은 나는 초등학생처럼 신이 났다. “큰 꿈을 키우는 행복한 올레길?!”이라고 혼자 킥킥대며 오후에 올레 10코스도 걷기 위해 서둘러 모슬포로 돌아가는 배를 탔다. 큰 꿈과 행복을 혹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