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4] 10코스 모슬포
가파도에서 모슬포로 돌아오는 20분, 그 짧은 시간에 꿈까지 꾸며 꿀 같은 휴식을 취하고 곧바로 하모체육공원에서부터 시작되는 10코스를 역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루의 두 번째 올레코스였지만 가파 초등학교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던 터라 초등학생처럼 꿈과 행복을 찾기 위해 배고픔도 잊고 씩씩하게 걸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0코스는 코스 경로도 그 위에 그려진 내 마음의 경로도, 개인적으로 최고의 올레 코스였다! (그래봤자 아직 4번째이지만 ^^)
10코스는 화순 ~ 모슬포를 지나는 15.6km로 어제 걸은 7코스보다 짧았지만 역사, 지리학, 풍경 등 볼거리와 생각거리가 아주 알찬 코스였다. 처음부터 넓은 들판을 거니는데 정말 나밖에 없어서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알뜨르 비행장’과 ‘섯알오름’이 나오는데 아무 공부 없이 갔던 나는 여기까지 해맑게 걸어온 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비행장은 일본이 2차 대전 당시 건설했던 아픈 역사의 비행장이었고, 오름은 4.3 제주항쟁 이후 최대의 양민이 학살된 곳이었다. 제주도에서 가장 슬펐던 곳이다 (외돌개 미안). 사실 천천히 더 그 슬픔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섯알오름으로 올라가기 전 잠시 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계속 나를 보고 삥삥 돌아서 112까지 눌렀었다. 우연인 건지 내가 112 신호를 기다리는데 다행히 군인아저씨가 구세주처럼 나타나주셔서 황급히 자리를 떴다. 괜한 오해였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짧은 순간 나는 무서움을 느꼈는데 학살 전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이 들면서 더욱 슬펐다.
모슬포 넘슬포 ㅠㅠ
슬픔 후 찾아온 기쁨은 배라고 했던가.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송악산’의 병풍을 자처한 바다는 나에게 평온을 주었고, 그 가운데 자리 잡은 ‘형제섬’은 형제답게 두 배로 귀여워 보였고, 산방산 ‘용머리해안’은 멀리서 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냥 경이로웠다.
그런데 가장 큰 기쁨을 느낀 곳은 이 모든 곳을 지나치고 이제 더 관광명소도 없고 에너지도 최저로 떨어진 마지막 2km쯤 때이다. 역시 하루에 두 코스는 무리인지 조금만 경사가 올라가도 힘이 쭉 빠졌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때가 너무 행복했다는 것이다. 잠시 앉아 내가 지금 행복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 단계별로 나뉘었다.
1단계: 두 코스를 걸어보자 (7시간…).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고 걸어본 길이 아니라 조금의 용기가 필요한 길을, 내가 해보기로 선택했다는 마음에서 행복 +1
2단계: 걷기 시작. 행동하는 그 자체에서 행복 +10
3단계: 아무도 없는 10코스 초반. 어디가 길인지 찾아가면서 우여곡절을 겪다 보니 자신감과 도전정신이 생겨서 행복 +50
4단계 (지금): 끝냈을 때 얼마나 행복할까. 이렇게 쉽지 않은 걸 내가 해내면 끝냈을 때 얼마나 즐거울지 상상하는 단계에서 행복 +100
그리고 마침내, ‘화순금 모래해수욕장’에 도달했을 때, 그 슬프고 외롭고 예쁘고 힘든 험한 여정을 끝냈을 때는 그 어느 올레길 완주 때보다 행복했다. 내가 최고치로 행복을 느낄 때가 정리가 되었다.
쉬운 과제보다는 “도전적인 과제”를
누가 시켜서가 아닌 “내가” 하기로 선택하고
능력에 상관없이 일단 바로 “실행”했을 때
여기에 그 과정이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이때 해냈을 때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그 시간, 나의 행복은 가장 컸다. 예쁜고 멋진 것을 보는 건 덤의 행복이었다.
안타깝지만ㅠㅠ 나는 놀멍쉬멍으로는 큰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회사 일이 어렵다고 투덜대고, 주말에는 그래서 쉬었는데 뭔가 찜찜하고. 현실 속 힘든 상황에 부딪히면 또다시 투덜대겠지만, 이제 내가 큰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내가 능동적으로 어려운 과제를 선택하고 해 버리던지, 지금처럼 중간 행복으로 만족하던지 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회사에서 맡은 업무들도 조금 감사해지는 최고의 효과…)
숙소로 돌아와 사진첩을 보는데 10코스 종점에서 찍은 나의 사진은 그전 코스들을 완주했을 때보다, 오늘 아침 출발할 때보다 몇 배는 행복해 보였다. 저녁으로 산 멍게를 한 점씩 먹으며 오늘 걸은 올레길 지도 위에 내 행복의 지도를 그렸다.
의도치 않은 올레 셋째 날, 나는 이 기분 좋은 피곤함에 이제 중독되어 버린 것 같다. 내일부터는 올레를 걷기로 내가 선택한다! 기다려 올레~!!